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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Feb 16. 2021

더 불안해지더라도.

<사랑은 왜 아픈가>를 세 번 읽은 자의 에필로그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함께 살며 성장해갈 결정적 능력이자 동시에 인간과 문화가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관계와 감정으로부터 의미를 길러낼 줄 아는 능력은, 내가 보기에 자아 전체를 온전히 요구하며 자신을 완전히 잊을 만큼 헌신적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수 있도록 해주는 만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열정적 사랑은 불확실함과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이런 의미에서 열정적 사랑은 우리에게 중요한 바로 그것을 이해하고 실현해줄 지극히 중요한 원천이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우리 자아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환한 빛을 발하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다양한 욕구를 하나로 묶어준다. (중략)  열정적 사랑은 이런 막막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준다. 우리가 살며 겪는 모든 어려움은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는 이런 막막함 때문에 빚어지지 않던가. 그래서 사랑은 '애매모호함의 장벽'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성격을 강인하게 키워주며, 이를  궁극적으로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나침반을 손에 쥐어주는 유일한 사랑이다. (중략) 밀도 높은 감정을 맛보는 열정적 사랑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중요한지 알아볼 혜안을 뜨게 해 준다.  - <사랑은 왜 아픈가>  중 472쪽~473쪽



에필로그에 가서야 에바 일루즈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다. 일루즈의 열정적 사랑은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정의한 사랑과 비슷하다.  결국 현대라는 망망대해에 홀로 던져진  '나'라는 허약하고 외롭고 초라한 자아는 타인과의 관계(사랑)를 통해서만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사랑은 가능할까? ( 그리하여 벨 훅스 님은 자매애를 말씀하셨지..)


20대 초반 처음으로 연애다운 연애를 하나 싶었던 관계가 끝나버렸을 때, 그저 연애가 끝났을 뿐인데 발 밑에 꺼지는 것 같은 아득함에 오랫동안 힘들었다.  그 아득함이 과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것은 내 미성숙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애를, 관계를, 사랑을 조금 더 가벼이 여기도록 나를 채찍질했다. 관계가 나의 고유한 본질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담을 높이 올리고, 끊임없이 보수공사를 해댔다. 그 텅 빈 집에서 외롭기는 했지만 적어도 아프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게 성숙이고 성장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사랑은 왜 아픈가>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것은 성장도 성숙도 아니라 그저 회피라는 것을. ( 내 삶이 하나의 "역할놀이"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아마 이 회피 때문일 것이다. 무엇도 끝까지 경험하지 않고, 그저 수행하고 나서 지나가버리기를 바라는 것 같은 태도 말이다. )


다소 말랑한 에필로그와 달리 <사랑은 왜 아픈가> 본문에서는 건조하고 치밀한 문장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특히 이성애 여성들에게 사랑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사회학적 분석'을 해준다. 지배적 선입견( 남자는 심리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본래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존재이며, 여자는 자신의 심리학적 본성을 따르기만 하면 사랑을 찾기 쉽고 또 더욱 잘 유지할 수 있다는 통념. 결론적으로 남자는 감정적으로 무능하며 여자는 자신의 감정 기질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편견(470쪽))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던 내 뇌구조로 그녀의 분석을 따라가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도, 번번이 논의의 전개를 놓쳤다. 그럼에도 끝까지 책을 놓지 않고 읽고, 그리고 또 읽은 이유는 조금씩 새롭게 구조화되어가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 뭐 이런 병맛 같은 나르시시즘?) 


나의 불안은 내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지극히 사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공동체에서 자유로워진 개인이 마주한 실존적인 것이다. 내 불안이 실은 네 불안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았다면 이상한가? 축복의 탈을 썼지만 독이 되기도 하는 자유가,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평등의 언어가 남녀관계의 권력을 교묘하게 숨기고 오히려 여성들을 새롭게 억압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의 딜레마(독립적이고 싶지만, 동시에 남편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 보호받고 싶지만 지배받고 싶지 않은 마음)를 설명해주었다. 인정에의 욕구가 나의 유기 불안에서 온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현대인에게 당연한 바람이라는 설명이 내가 쌓아 올린 담에 균열을 일으켰다. 제도화된 상상력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의 시시함에 눈물짓는 것이 우리가 처한 보편적인 상황임을 알고 나니, 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객관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읽으면서 내 안에서 일어난 변화들이다. 


나에게 이런 변화를 선물한 이 멋진 언니는 에필로그의 한쪽에 "남성을 두고 감정적으로 무능하다고 못을 박는 대신 우리는 '감정을 소중히 하는 남성성'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이끌어내야만 한다(474쪽) " 라며  슬며시 자신이 생각하는 대안을 숨겨두는 귀여움을 보여주기도 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책을 끝맺었다. 


현대에 대한 냉철한 긍정은
우리가 맑은 정신으로 자신을 더 잘 성찰할 때 이 시대를 더 잘 살아낼 수 있으며,
심지어 새로운 형식의 열정적 사랑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나지막한 희망만을 주리라. 
- 사랑은 왜 아픈가 중 475쪽 


  쳇바퀴를 도는 햄스터는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쳇바퀴 밖으로 탈출해야만 앞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쳇바퀴를 탈출한 햄스터는 과연 행복할까? 동서남북 사방이 열린 공간이 오히려 혼란스럽지 않을까? 심리학에 기반한 자기 연민이 지금까지의 내 삶의 구심점이 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아는 사람은 아는 감정이겠지만, 정의된 불행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이 있다.  


그런데 일루즈 언니는  맑은 정신으로 자신을 성찰하라고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성애 관계, 특히 핵가족 구조에서 남편과 맺는 관계로 한정 짓기보다는 내가 맺고 경험하는 '관계'라고 다시 정의해본다면,  <사랑은 왜 아픈가>는 나에게 일종의 자기 계발서와 같다. 나를 이루고 있는 허위의식을 버리고, 쳇바퀴 밖으로 나가 열정적 사랑을 찾아보라고 꼬시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자본주의 시대에 참 맞지 않는 자기 계발이긴 하지만 말이다. 


과연 나는 안정된 불행을 버리고 더 불안해질 수 있을까? 

그리하여 허무와 권태와 무기력함에게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                                               


P.S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고 싶으나, 내용의 방대함으로 2장을 읽으면  1장의 내용을 까먹고, 3장을 읽으면 2장의 내용을 까먹는 안타까운 이해력과 기억력 때문에 그것은 네 번째 읽었을 때(?)를 기약하고, 오늘은 

이 책이 내 안에 만들어 낸 분열에 대해서만 간단히 기록하기로 한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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