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한 질문

<위태로운 삶>을 읽고

by 네오페이퍼


2001년 9월 11일 처음으로 미국 본토가 공격당했다. 미국은 이 공격을 테러로 정의하고, 자기 방어라는 명분으로 군사적 대응을 감행했다. 뿐만 아니라 이 공격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그것은 테러범들을 면책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복수를 감행한 정부에 대한 비판을 막고 보복성 공격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했다. 자기 방어와 테러리즘 근절이라는 명분은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었다.


폭력의 피해에 대해 도덕적 분노나 공적인 애도는 정당하다. 그러나 폭력을 당하는 것과, 피해자 정체성으로 대상에 대한 무제한적 공격을 가하는 것은 다른 문제[1]다. 폭력에 대한 대응이 반드시 공격적 복수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올 뿐이다. 그리고 그 끝은 아마도 공멸일 것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다른 길은 없을까?


버틀러는 폭력의 악순환을 유발하는 미국의 대응을 비판하며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이 국제 공동체의 일부로서 집단적 책임을 사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이는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우월적 지위를 내려놓고, 말해진 것 이상을 들으려고 노력할 때 가능하다. 이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평등과 비폭력적 공조에 대한 헌신에 기반을 두는 국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위태로운 삶」은 그 길로 가기 위한 버틀러의 고민을 담고 있다.



인간은 취약한 존재다.


우리는 자신이 자율적 주체로 삶에 통제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근대적 사고방식이다. 포스트구조주의 혹은 타자 철학에 따르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는 허상이다. 버틀러 역시 「젠더트러블」을 통해 주체는 구조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위태로운 삶」에서는 주체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나를 구성하는 독자적인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은 관계의 한 양태로, 타인 덕분에 가능한 존재 방식[2]이다. 너와 나는 분명히 다른 존재지만 서로를 구성하는 무언가를 가진, 유대관계로 이해해야 하는 관계성[3] 속에 있다. 이는 물리적으로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버틀러는 이를 ‘인간 공통의 취약성’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구성되기도 하지만 관계로 인해 박탈되기도 한다. 서로가 연루되어 있기에 혼자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때 우리는 상실과 박탈 속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을 감내하며 변화하는 우리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취약한 자에 대한 슬픔과 애도는 차별적이다.



폭력은 타인에 대한 일차적 취약성이 가장 무섭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타인의 의도적 행위로 인해 삶 자체가 말소[4]될 수 있다. 상시적인 폭력에 시달리면서 방어를 확보할 수단이 주어지지 않은 경우에 인간의 취약성은 크게 약화된다. 그러나 상실을 경험하는 이들의 슬픔이 항상 모두에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는 애도를 받을 수 있는 이와 없는 이가 구분된다.


앞서 언급했던 9.11 테러는 3천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온 사건이었다. 너무나 큰 상실이고 슬픔이었기에 미국은 당연히 그들을 오랫동안 깊이 애도했다. 문제는 이후 미국이 행한 전쟁이다. 미국은 방어권을 내세우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무차별 폭격을 쏟아부었다. 미국의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며 터지는 화려한 폭탄 아래, 그 폭격으로 삶이 부서진 이들의 울부짖음은 음소거되었다. 미국과 미국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의 죽음은 보이지 않았고 애도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은 지금까지 자국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관타나모 수용소에 사람들을 무기한 구금하고 있다. 그들은 국제법 혹은 미국 국내법 그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미국 행정 관료의 자의적인 판단 하에 관리되고 있다. 기본적 인권조차 누릴 자격을 박탈당한 채 벌거벗은 삶으로 내몰렸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비판은 미국 내에서 허용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행한 폭력에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이들이 반유대주의자로 몰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공적으로 수용 가능한 발화의 영역이 제한되어 불법적 폭력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슬픔의 틀로 정치적 공동체를 상상하다.



버틀러는 모든 상실이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다. 우리는 모두 취약하지만, 애도 가능성은 차등적으로 배분[5]된다. 슬픔과 애도는 나를 구성한다고 인정되는, 나의 인식 가능성의 범위 안에 있는 이들을 상실할 때에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사회계약에 따라 자율적인 개별 주체들이 정치적 공동체(국가)를 구성했다고 배웠다. 삶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법적 주체로서 권리를 쟁취하고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법의 언어로, 합리성의 언어로 나 자신을 설명하고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상실을 경험한 미국이 자기 방어권을 근거로 민간인을 향해 무자비하게 폭탄을 발사하는 것이 미국의 주권을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이해해야 할까? 그때 가려지는 애도가 불가능한 존재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압사당하는 사고가 일어날 때까지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공무원들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법적 책임 주체를 찾을 수 없다면 세월호 희생자들은 개인적으로 그저 운이 없었던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까?


버틀러는 다른 관점으로 정치적 공동체를 사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물리적으로 의존하고 취약한 존재들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유대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실과 그로 인한 슬픔을 사적 감정이 아닌 정치적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을 가진 모두가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취약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연루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나의 어떤 행동이 너의 삶을 바꿀 가능성이 있음을 아는 것, 너의 어떤 선택이 나를 재설정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나를 유지할 수 있기를 요구하지 않고 관계 속에서 변하는 나를 수용하는 것. 그리고 기꺼이 나의 부서짐을, 나의 박탈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비폭력의 윤리를 사유할 여지가 생긴다. 버틀러는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서로의 물리적 삶에 대한 집단적 책임감[6]에 기반한 정치적 공동체, 비군사적이고 비폭력적인 형식을 사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취약성에 대한 인정은 타자의 얼굴에 대한 책임감이다.


버틀러의 취약성 인정에 기반한 비폭력 윤리는 레비나스의 ‘얼굴에 대한 책임감[7]’이란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레비나스 역시 버틀러처럼 인간은 유대관계 속에 있음을 전제로 한다. 유대 관계 속의 타자는 나를 선행하여 나에게 얼굴로, 소리로, 또 다른 형태로 말을 걸며 내가 재구성되기를 요구한다. 타자의 말 걸기에 대응한다는 것은 나의 상실과 박탈의 가능성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사소하게는 지금 누리는 기득권과 평온함을 포기하는 것에서부터 극단적으로는 내 생명을 담보로 내놓아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생존의 두려움을 느끼는 나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타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자기 보존의 명분 하에 살인을 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인하지 말라”는 윤리적 계명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살인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정말로 살인하게 될까 봐 불안하다. 버틀러는 두려움과 불안함의 긴장 관계 속에서 비폭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고 본다. 모든 순간에 타자의 위태로움에 깨어있기를 명령하는 윤리적 계율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취약성의 인정을 요구한다.


질문이 필요하다.



슬픔도, 애도도 알아야 그리고 보여야 가능하다. 언론에서 재현된 오사마 빈 라덴, 사담 후세인, 야세르 아라파트의 얼굴은 전쟁의 목표물이라는 목적에 복무하며 우리가 애도해야 하는 고통과 슬픔의 장면을 은폐한다. 드러나야 할 희생자들은 언론에서 감춰진다. 언론 매체들은 무엇을 보여줄지 혹은 배제할지 정한다. 자신들의 규범의 인식 가능성의 도식에 따라 무엇이 인간적인지 아닌지, 무엇이 살 만한 삶이고 애도할 만한 죽음인지 결정[8]한다. 앞서 버틀러가 취약성의 인정이 기존의 규범에 의존[9]하는 한계를 지적했던 부분을 떠올려보자. 타자의 얼굴을 조작하면서 다른 규범을 만들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을 알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보여주는 것만 볼 때, 보이는 것이 감추고 있는 것을 모를 때 우리는 기존의 담론 틀 안에서만 사고하게 된다. 애초에 레비나스는 인간적인 것은 재현의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는 담론의 필연적 한계다.


이 지점에서 버틀러는 드러남의 영역 안에서 인간성의 외침이 응답할 수 있는 보기와 듣기의 공적인 형태들을 확립하는 일[10]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한다.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되던 일들이 공동체 내에서 함께 해결해야 할 정치적 문제로 논의되고 필요한 제도들과 기관들을 설립하는 것이 공적 형태들을 확립하는 과정일 것이다. 우리의 국가인권위원회, 해바라기 센터들이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딥페이크 범죄 피해를 막기 위한 논의들과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정책들을 만들어가는 것 역시 공적 형태를 확립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선행적으로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질문이다. 우리는 뾰족하고 예민하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의 한계점에서 인간적인 것의 나타남과 사라짐에 대해 질문[11]을 해야 한다. 그것이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윤리적 주체가 되는 시작이다.



[1]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26쪽

[2]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52쪽

[3]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50쪽

[4]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59쪽

[5]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13쪽

[6]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60쪽

[7]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90쪽

[8]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209쪽

[9]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77쪽

[10]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210쪽

[11] 주디스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피 215쪽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타인에게 온전히 감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