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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가 나에게 준 선물

몰입이 주는 성과

by 노연석

산기슭을 타고 내려온 바람은 낚싯대를 드리운 저수지에 물결을 잔잔하게 일으킨다. 내 고향 시골에는 농사짓기 위한 용도의 저수지가 있었고 그곳은 나와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여름방학이면 나는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고 한량 같은 삶을 살았었다. 얼굴은 항상 검게 그을려 누가 봐도 알아챌 수 있는 영락없는 시골 아이였다. 그 시절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낚시였고 중학교까지 공부 아닌 낚시에 빠져 살았다. 내가 더 이상 낚시를 하지 않는 이유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 위에 흔들리는 찌를 바라보고 있다 보면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밀려오는 물결을 바라보고도 있어도 나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잔잔한 물의 흔들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머릿속에는 세상 어떤 것들도 개입되지 못한다. 마치 멍 때리기와 유사한 상태에 이르며 내가 처음 경험한 몰입의 수간들이 아녔을까?


한여름 땡볕에서도 엄청난 몰입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오로지 눈, 귀 그리고 온몸이 혼연일체가 되어 물 위에 떠 있는 찌에만 집중을 한다. 가끔 저수지 한편에서 튀어 오르는 잉어의 힘찬 도약이 만들어내는 첨벙거림이 적막을 깨우곤 하지만 이내 물 위의 찌를 다시 응시하고 빠져든다. 몇 시간째 입질이 없어도 꼼작하지 않는다.


어떤 날은 친구들과 밤을 새우며 낚시를 하기도 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낚시를 했을까? 생각해 보니 시골에서 딱히 할 수 있는 놀이들이 많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농사를 짓는 시골에 집에 앉아 있으면, 언제 농사일의 현장으로 끌려가야 할지 몰라서였는지도 모른다.


공부라도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더라면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그냥 두셨겠지만 어릴 적부터 공부와는 인연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자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신기할 따름이다. "사람일까"란 생각이 든다.


나의 낚시 생활은 고등학교를 올라가면서 종착역에 도달을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이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생활은 나름 바빴다. 학교 수업 외에 다른 활동들을 하면서 낚시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낚시의 무대는 저수지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살았던 시골은 바닷가는 아니지만 낚시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동네 입구를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시냇물은 언제나 나에게 낚시터가 되어 주었고 마을 뒤편으로 흐르는 강은 지상 최고의 낚시터가 되어 주었다.


비가 오면 시냇가로 강가로 낚시를 하러 가기 위해 집 주변에서 지렁이를 캐낸다. 소외양간 뒤편에는 외양간에서 치워 쌓이던 소똥이 산처럼 쌓여있다. 이 소똥은 거름으로 재활용이 되지만 여름 장마가 시작되는 시기에 지렁이를 공급받기 위한 최적의 생산 공장이 되어준다. 더럽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낚시를 위한 미끼를 채집하고 낚시에 대한 생각으로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시절 낚시는 내 삶의 전부였다. 학교 공부보다 더 재미있고 태어나서 가장 열심히 해 본 일중의 하나이고 최초였는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강태공이 되었어도 되련만. 하지만 그걸로는 먹고살지 못한다. 나는 학생으로는 빵점이었다. 중학교 생활은 엉망이었고 어차피 나는 대학에도 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공부를 하지 않고 살았다. 농사일로 늘 바쁜 부모님들도 사실 내가 공부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고등학교도 남들 다 가는 곳에 가지 못할 만큼 성적이 형편없었다.


시내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소요되는 되는 곳이니 걷는 시간을 포함하면 하루에 통학시간만 2시간 넘게 소요되었다. 공부를 하지 않은 덕분에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시골에서 더 시골에 있는 학교로 나는 3년을 꼬박 다녀야 했다. 공고라고 불리는 공업고등학교를 다녔다.


그곳에 나와 같은 친구들로 넘쳐났다. 나처럼 공부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고 그렇다고 특별한 재주도 없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어찌 보면 불쌍한 친구들로 넘쳐났다. 이 학교에는 적응하기도 너무 많이 힘들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은 몇 되지 않았고 그나마 반이 다르다 보니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 가야 했고 내성적인 성격의 나에게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생활은 공부를 떠난 생활 자체만으로도 피곤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이런 학교의 특성은 학생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삶의 터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를 쥐어 주는 곳이기에 공부에 대한 열정이 없다. 다만 있다면 자격증 취득에는 목숨 걸고 담임 선생님들이 관리한다.


그 시절 우리 학교는 몇 년째 취업률 100%를 자랑하는 외부에서 보기에 훌륭한 학교였다. 그 이면에는 무수한 잡음들이 많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100%라는 것은 학교 선생님들이 이루고 싶은 소망이었지 학생들을 배려하는 목표치는 아니었다. 나는 그런 곳에서 공부를 했다.


중학교 때부터 친하던 친구가 이 학교를 같이 다니는데 이 녀석이 어느 날부터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전교 1등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나는 건전하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공부는 점점 더 뒷전이고 담배에도 손을 대며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난 도대체 뭘 하고 살고 있는 것인지?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인지? 아직도 나는 나에게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꿈이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 혼돈의 시절이었다.


나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 잡기 시작했다. 전교 1등 하는 친구를 따라잡지는 못해도 근처라도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험 때가 되어도 대충 공부하다 말던 나였고 책상머리에 오래 앉아 있지도 못하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난 후 나는 조금씩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늘려갔다. 선생님들이 그렇게 원하는 자격증 취득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다. 난 고2 때부터 1년간 4개의 자격증을 취득할 만큼 열심히 했다. 어떤 자격증 시험에는 사전같이 엄청 두꺼운 책을 6번이나 본 적도 있다. 그 시험은 한 번에 붙었었는데 지금 생각해니 보니 6번이었지나 7번 읽기 공부법을 내가 실천했었던 것에 조금 놀랍기도 하다. 그때가 낚시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몰입하던 그 순간의 경험들이 공부에서 재현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나의 성적은 하늘의 끝이라도 찌를 것처럼 빠르게 솟아올랐다. 그리고 목표로 했던 그 친구의 성적에 가까워져 가는 꿈은 내가 노력했던 것보다 더 일찍 이루어졌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던 때다. 그 이후로 대학 입시공부를 할 때도 그렇게 열심히 하지 못했고 책상 앞에 그렇게 오래 앉아 있지도 못했다. 대학 도서실에 오래 앉아 공부를 하지 못했던 덕에 성적은 사실 엉망이었다. 간신히 졸업을 했으니.


나는 그 친구의 자리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그 자리에 올라보니 또다시 공부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공부에 다시 손을 놓았고 그 친구에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쉽게 물려주었다.


낚시를 통한 몰입의 경험은 나는 다른 일을 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몰입했던 경험도 그 이후 내 삶에 다른 일을 할 때 몰입을 하게 하는데 분명히 도움이 되어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몰입을 통한 성과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몰입하는 법을 몸으로 체득한 덕분에 공부에도 적용을 하면서 나름 괜찮은 성적을 받아 좋은 기업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담임 선생님과의 마찰이 있었다. 여전히 공부하기 싫어하는 나는 대기업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왠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몇 번의 면담을 했지만 끝내 나는 백기를 들어야 했고 내 인생은 꼬여 버렸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욕을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담임 선생님에 백기를 들고 대기업에 원서를 냈는데 운 좋게 한방에 붙어버렸다. 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떤 학생인지 실체를 알고 나면 자신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겠지만 그 이후의 면접,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불합격 처리가 되지 않았다.


그 시절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담임 선생님과 싸웠던 이유는 대학은 가지 못하지만 나름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건 선생님이 보기에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고 학교는 100% 취업에 1%라도 흠을 내는 일을 만들면 안 되기 때문에 절대 용납하지 않았었다.


만약 내가 그때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갔었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 지금보다 더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며 더 형편없는 삶을 사고 있을까? 그건 알 순 없지만 내 인생이 꼬여 버렸다는 생각은 맞아 들었다.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욕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너무도 편안하고 안락한 곳에서 안주하며 꿈을 잃은 채 살아왔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이다. 그때는 이런 생각들을 하지 못했고 입사 후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 보다는 생각으로 오늘까지 살아온 것 같다.


꼬여버렸다는 생각 중 하나는 이 회사에서 나는 너무도 많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한 도전을 받았고 늘 그것은 스트레스로 돌아왔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는 미생에 머물러 있었다. 나의 학력은 회사에서 앞으로 나의 성장에 치명적이었고 평생을 평사원으로 지내다 마무리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다시 몰입을 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떠나고 심지어 군대를 마치고 난 후라 머리는 다 굳어 있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란 의문은 있었지만 군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생각들이 멈추지 않아 어떻게 할지 고민을 했었고 회사에 복직 후 난 1년을 수능 준비를 해 시험을 치렀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과정도 사실 쉽지 않았다. 역시 굳어 버린 머리는 회전을 하지 않았고 완전히 가망이 없어 보였다.


모의시험 성적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성적이 아니었다. 이건 뭐 그냥 눈감고 찍어도 이보다 더 많이 맞을 수 있는 거 아닌가란 현실 앞에 나는 많은 좌절을 했다. 하지만 시작한 것을 중단을 할 수 없었다. 입시 학원을 꾸준히 다니면서 조금씩 성적은 오르긴 했지만 이 성적으로 어디를 갈 수 있을까?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수능을 치르고 받아 든 성적표는 모의고사 성적보다는 좋게 나왔지만 이대로 여기서 끝내야 하는가라는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나는 두 학교에 원서를 냈다. 한 곳은 경기도, 한 곳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넣었는데 경기도에 있는 대학이 먼저 발표를 했고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상실감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기도에 있는 대학도 안 됐는데 인 서울이라니 당연히 안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좌절하고 포기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준비를 해야 하나라는 고민에 빠져 며칠을 지냈고 주변에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의 합격 소식을 들을 때마다 더 절망감에 빠져 들었다.


내 기억에 합격자 확인은 음성 ARS 같은 것으로 했던 것 같은데 기대를 하지 않고 수화기를 들고 합격 확인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개님은 "합격"입니다란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과는 같았다.


살면서 좋지 않은 순간들에 왜? 나만 이런 것을 겪어야 하는 가란 불평을 많이 하며 살아왔었는데 지난 일들을 회상하다 보니 나만큼 운이 좋은 사람도 없었구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나의 대학 생활은 그냥 학원을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성적도 형편없고 노력만큼 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심지어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분야까지도 이해를 잘 못하는 상황이 발생을 해 상처받기도 했다. 사실 내가 몰입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졸업장이 필요했던 거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런 그런 마음을 모르시는 부모님은 좋아하셨다. 내가 대학에 가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셨을 텐데 그저 대견하기만 했지만 학비 한 푼 대 주지 못하시는 형편에 항상 미안해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인데 누구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맞지 않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고 부모님께 그럴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었다.


공부는 못해 장학금을 받고 다니지는 못했지만 융자받아서 잘 다니고 직장 다니면서 착실히 갚아 나갔다. 졸업 후에도 얼마간은 갚아 나가야 했다.


대학 4학년의 과정 동안 아버지의 지병으로 앞당겨 결혼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모든 것이 혼돈 속에 어지러워 던 시절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장점도 많았다. 덕분에 이제 아이들은 다 커가고 있고 여러 번 그만두려고 했던 회사는 그래도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다.


하지만 회사는 변함없이 직원들에게 계속 성장할 것을 요구하고 공부시키고 시험을 보는 일을 꾸준히 이어 간다. 30년을 훌쩍 넘어버린 세월. 이제 남은 시간이 더 적지만 되돌아보면 굼벵이도 가는 재주가 있듯이 내게도 그런 재주가 있어 괜찮은 삶을 살았다. 그 간의 삶에서 몰입해야 하는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은 덕분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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