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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필리아노 Sep 20. 2021

나를 이렇게 만든 건 그 친구였다.

가을을 타다 : 내 곁을 떠난 동기들 생각에 잠기다.

며칠 전 출근길 버스 안에서 가을에 올라타고 나서 긴 생각에 잠겼다.


이런저런 옛날 생각에 빠져들다가 갑자기 내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어디론가 다 살아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 사람 한 사람 떠 올리고 있자니 그리움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주책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남자들은 여성호르몬이 많아진다더니 정말인가요? 그냥 내가 너무 감성적이어서 일까요? 알 수 없지만 찔끔 눈가를 적신 눈물을 닦아내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출근길이라 누가 볼까 민망했다.


나를 가을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며칠 전 골프 연습장에서 만났던 입사동기 때문이라는 스스로 판결을 내렸다.


그 친구를 본 이후로 내가 잊고 살았던 동기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나타나고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나를 어지럽히는 그 동기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가슴 한 편의 무언가를 건드려 그것이 눈물로 솟아난 것 같다.


가을에 올라 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번 가을은 뭔가 많은 일들을 해야 할 것 만 갖다는 생각이 든다. 내 동기들은 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나가는 동안 나는 계속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는데 언제 그렇게 다 떠나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동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시골집 사진첩에 들어 있는 동기들의 모습이 진실임을 말해주고 있지만 꿈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희미하다. 꿈을 꾸고 나면 꿈의 내용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처럼 너무도 희미할 뿐이다.


사실 동기들의 이름마저도 희미하다. 재범, 봉수, 현식, 정아, 효숙, 호재, 대중... 친구들 이름 중에는 가수도 대통령도 있었다는 사실이 이름을 적다 보니 기억이 난다.


시골집에 있는 앨범 속에 남아 있는 동기들과 함께 한 추억의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회사 근처 술집에 모여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이 붉어져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 요즘처럼 눈부시게 맑고 쾌청했던 어느 가을날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들, 기숙사 속 생활 담은 사진들...


항상 사진사가 되어 우리의 모습을 담아내던 친구. 아... 그 친구가 우리의 모든 사진을 다 찍어줬었는데 그 친구는 사진사가 되었을까? 부산 친구였는데,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동기들에 대한 기억은 그 친구가 찍어준 사진들로 인해 기억하지 않아도 될 또 하나의 기억이 되어 주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내 머릿속 용량이 부족해 삭제돼버린 것 같기도 하고, 사진으로 남아 있어 삭제를 해 버린 것 가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사진이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을 보니 더 많이 찍어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 친구들이 모두 회사를 떠난 건, 내 곁을 떠난 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 아픔이 있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0년을 버텨 왔었지만 어쩌면 미련 한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잘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고 다른 생각을 할 만큼의 똑똑함도 없었기에 버틴다기보다 그 직장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른 길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곳만 한 곳은 없다고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아픔이라는 것은 가방끈이 짧다는 것이었다.

이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의 어디에서나 가방끈의 길이에 따라 결정되는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고 지금도 현실이 아닐까.


우리가 입사를 한 곳은 기업의 연구소였고 그곳에는 석, 박사와 해외 물을 드신 분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에베레스트 산과 같이 넘기 힘든, 넘는다고 해도 살아남기 어려운 현실 앞에 던져졌다고 생각을 해던 것 같다. 


그 산을 넘던가, 피해 가던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다시 학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런 분위기에 모두 휩쓸렸던 같다. 


지나고 나서 보니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을 게다.


어느 순간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시 회사일을 마치고 종합학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년에 걸쳐 나를 비롯해 친구들 모두 대학 문턱을 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 주경야독으로 학업을 이어갔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대부분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나만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 후론 그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한 번쯤 모두 모여서 옛날이야기를 하며 추억을 안주삼아 술 한잔 한번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지 못했는지도 의문이다. 


연락처가 없지만 연결고리를 찾아가다 보면 다 찾아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모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왜, 나만 여기에 남아 있을까? 란 생각 때문에, 난 왜 혼자가 된 걸까? 란 생각 때문에 그리움보다 더 가슴이 먹먹해지고 먹먹해짐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그리움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이 아닐까? 마음만 먹으면 연락처를 찾아내고 연락해서 만나고 옛 추억들을 다시 꺼내어 곱씹으면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안 되더라도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시도해 봐야겠다.

모두들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 설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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