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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망상

by 노연석

가끔씩 나는 누구인가? 왜 지구별에 살고 있는가? 란 생각을 해 본다.


수많은 과학적 증명, 증거, 이론들은 모두 조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도 해 본다.


나는 지금 가상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는 망상까지 해 본다.


어린 시절 가끔 멍 때리고 있다 보면 무아지경에 빠지곤 했었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는 내가 아닌 세상의 다른 무언가로 혼연일체가 되었던 것 같다. 그 순간에 나는 나의 존재를 잊었던 것 같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라는 고민들을 하지 않아도 될 나이였지만, 나의 현실을 도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정체성이 없어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런 순간들은 고등학교 때까지 가끔씩 일어나곤 했었다.


러나 나는 어떤 해답도 깨달음도 찾지 못한 살고 있던 곳을 떠나 세상의 다른 지점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멍 때리고 있어도 그런 생각에 빠져드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그때 그 상태는 내가 다시 갈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시공간인지도 모른다. 는 생각도 해 본다.


어린 시절 별다른 고민이 없이 살았다면, 그곳을 떠난 현실의 세계에서는 배워야 할 것이 많아지는 만큼 고민해야 하는 것들도 많아졌고 어떤 한순간에 몰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퇴화되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역시 그렇다. 눈을 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해 보려 하지만 나에게 얽히고설킨 끈들이 너무 많아져 여기저기로 생각이 분산되고 깨지고 돌아오고 흩어지고를 반복하고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없다.


아마도 어린 시절 그때는 이런 수많은 인연의 끈들이 엮이지 않은 상태라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무아지경이라는 상태에 들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한동안 새벽에 명상을 했었던 때도 잠시만 방심하면 내 생각은 어느새 회사에 출근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고, 퇴근 후 약속, 출근길에 마주할 상황 들, 주말에 있을 일들에 대한 생각 등으로 내 생각들은 분산되고 정신없이 떠돌아다녔었다. 그런 순간을 알아차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지만 잠시뿐이었다.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살아가면서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신경 써야 할 수많은 일들을 시달리다 보니 어느새 그것이 만성이 되어 버리고 회복 탄력성 따위는 통하지 않고 고착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무언가에 집중하려 해도 산만해진 정신 덕분에 쉽지 않은 일이 되고 이내 포기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렇다면 나는 그 어린 시절 무아지경에 빠졌던 삶의 순간을 지금 영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길로 와 있는 것일까?


예측해 보면, 아마도 나는 내가 어릴 적 상상하던 삶에 가까워져 있는 것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방향이 옳건 옳지 않건 간에 생각하는 대로 이동해 가기 때문이다.


또렷하지는 않지만 내 어린 시절 시골에서의 삶은 걱정이 살 수 있는 환경이기는 했지만 그 환경에서 계속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17살이라는 나이에 그곳을 떠나고 말았던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그 시작은 나의 의지와 생각대로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아니겠지만, 평생을 살아오면서 중요한 순간들에 대한 결정을 하고 생각을 하고 실천으로 옮기면서 살아온 지점이 여기다. 그 다지 나쁘지 않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나는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아침에 출근을 하다 길거리에서 마주하는 새벽부터 밥벌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자전거, 오토바이로 배달일을 하는 사람들, 노점상인 분들 등과 같은 더 힘든 일들을 하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나는 잘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분들을 스쳐 지날 때마다 지금 내가 힘들다고 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다독이기도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에 조금 가까이 간 것 같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나는 이 사회에서 그래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 가족이 있고, 가족이 머물 집이 있고, 가끔 같이 여행을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나의 이상은 아니었을 거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꿈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그 순간이 더 이상 꿈이 무엇이었는지 잊게 하는 순간들이 밀려온다.


당장 밥 먹고 살기도 힘든데 꿈을 꾸지만 조금 멀어져 간다. 가정을 꾸리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꿈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잘 살아온 것 같은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내가 꿈꿔왔던 순간이 지금 이 순간이었던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다시 나에게 묻는다.

아니 나는 꿈꾸던 나로 살아왔는가?로 묻는다.

아마도 대부분의 분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다.

없었던 것 같지만 모두에게 꿈은 있었다.


지금 그 꿈에 도달하지 못한 건 결국 그 꿈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숨겨 버렸기 때문 일 것이다.


그간의 내 삶은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꿈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내고 있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라는 말이 맞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 옳고 그름은 실천을 해 본 후에 결정을 해도 늦지 않다. 사실 잘 알면서도 우리는 쉽게 도전하지 못한다.


이 나이에 무슨? 지금 내가 잘할 수 있겠어? 이제 손발이 말도 잘 안 듣고, 기억력도 좋지 않아 잘 못할 것 같다는 선입견으로 꿈을 한번 더 포기하고 있지 않는가?

아이들이 좀 다 크고 독립하면 한번 해 볼까?

그때 꿈을 실천해도 늦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늦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어쩔 수 없는 제약 사항들이 많아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이 숨겨둔 나를 다시 꺼내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 에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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