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가 35년 가까이 한 직장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안정된 곳에서 안정된 삶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란 두려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을 가진 자아가 더 우위에 있었기에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를 내지 못했었다.
새로운 것이 가져다주는 부담과 새롭게 무언가를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에 언제나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길을 가로막았었다. 그 자아와 타협하는 삶을 살아왔다. 안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세상으로 발 딛으려 할 때 갖게 되는 두려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늘 두려움을 물리치고 나아가려는 용기와 늘 줄다리기를 한다. 대립관계. 내 안의 자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와의 반대편에 서는 사는 사람들이나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며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것을 주저하게 하는 자아도 같은 모습이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오면서 살아가면서 내 안에 여러 개의 자아가 만들어지고 상황에 맞게 출현하기도 하고 앞 세운 자아의 뒤에 숨어 있다가 출현할 기회를 노린다.
두려움의 자아의 지배를 받으면 살아온 삶은 비록 안정적이고 편안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을 더 폭넓게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의 자아가 우월했더라면 조금은 더 다양한 경험과 다채로운 생각을 하며 살았었을 수도 있지만 그 반대 편에 서서 어쩌면 두려움의 자아가 더 우월했던 삶을 살았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했었을 수도 있다.
두려움의 자아는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한 것일까?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이라면 부모가 가진 성향을 물려받았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태어나 살아가면서 부모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키워져 온 것일 것이다. 그 키가 자랄 수 있게 한 자영분은 "안돼, 위험해, 조심해"와 같은 말들이 아니었을까?
두려움의 자아는 필요한 것일까?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월한 자아의 반대 편에 있는 자아를 언제나 동경했었을 수도 있다. 나에겐 가끔 반대 편에 선 자아가 좀 더 힘을 내주길 바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언제나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뿐 선을 남으려 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욕심과 반대편으로 넘어 서려할 때마다 출연하는 것은 두려움의 자아였다. 어쩌면 그 반대편에도 두려움의 다른 자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반대편에서 다시 넘어 오려할 때도 발목을 잡는 자아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두려움의 자아는 어디에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 수도 있겠다.
몇 년 남지 않은 직장 생활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은
퇴직에 대한 두려움
퇴직 후의 삶에 대한 두려움
안정적인 환경을 벗어나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오늘도 여전히 두려움의 자아와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