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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by 노연석

같은 장면이라도 보는 위치, 높이, 방향, 시간 등의 변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틀리지는 않지만 다름이 내재되어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모습과 성격 등은 전부 중에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가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여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상대를 판단한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쌓아온 나의 지식들은 지식이 아닌 그저 세상 모든 것들의 단편적인 파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 간다. 20년 넘게 살아온 아내도 아직 모르는 것들을 발견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자연도 사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평생 죽을 때까지 100% 완벽하게 이해하고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일이다.


삶이란 모르는 것들을 앎으로 채워가는 것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부족함을 채워 가는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100% 완벽하게 채울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사람이 아닌 존재일 것이다. 신일 것이다.


부족함이 있어 더 채울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 삶에 의미를 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넘쳐나면 나태하지고 게을러지고 결국에 스스로를 망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복권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재산을 탕진하고 길거리로 나 앉았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부족함을 채우는 삶은 운명이지만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채워야 하는데 노력 없이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을 채워 넣으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과식을 하면 탈이 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자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것은 부러움과 미움이다. 그들의 단편만 보고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채우고 부를 채워갔는지는 확인하지 않고 그들에 대한 편견을 가진다.


부자들과 세상에 유명세를 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나는 그 정도로 열심히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지만 그들처럼 열심히 살아갈 용기도 자신도 없기에 나는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들을 따라 잡기는 어렵다. 그럴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그들의 노력의 결과물을 즐기고 누릴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100세 시대를 운운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단명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세상 모든 것들은 사용하는 만큼 마모되어 달아 없어지면서 고장이 나고 약해진다. 그 약함이 극에 달 했을 때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각자가 가진 삶에 에너지 총합이 있고 그 에너지를 다 고갈하게 되면 충전 가능한 배터리와 다르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삶에서 힘든 순간 쉼이라는 것을 통해 충전을 하지만 그 행위조차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다. 쉼은 불안정한 상태를 안정상태로 만드는 것이지만 여기에도 에너지는 소비가 된다.


그런 시선으로 부자가 아닌 사람들을 바라보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더 많은 부, 지식, 권력을 얻기 위한 시점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 시간들이 길어지면 고장이 나게 된다. 각자가 가진 에너지를 어느 순간 너무 소비해 버렸기 때문이다.


운명이 있다는 것을 믿는 편이다. 현실에서 도피해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서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 운명이고 변화를 위해 소비한 에너지 덕분에 내게 주어진 에너지를 더 많이 소모하게 될 뿐이다.


요즘은 의료과학이 발달해서 부족한 에너지를 채워주기는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완벽하게 복원을 될 수 없다.


세상을 너무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는 이유다. 내가 가진 에너지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를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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