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장난감 가게만 갔다고?

내향인으로 살아가기

by 부리도

평생을 따라다니는 고민이 있나요? 살다 보니 옛날 고민은 생각도 나지 않는데 설마 그런 고민이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온갖 고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내가 평생을 어떤 고민으로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니! 그렇게 나를 평생 괴롭힌 놈. 그건 바로 성격이다. 내 기억엔 철 모르는 시절을 제외하고는 늘 성격을 고민했다. 마음속으로 '내 성격이 문제다. 내 성격이 문제다... ' 이런 식으로 고민한 것은 아니다. 성격은 다른 일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보다는 결국은 '성격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가? , 그때 그 사람과 소통을 잘했어야 일이 잘 됐을 텐데... 그러고 보니 내가 소통을 전혀 안 했구나! 문제는 나였네... 내 성격이 문제네... 왜 난 적극적으로 먼저 연락하지 못하는 걸까?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왜 또 도망간 걸까...'등등 이런 식이었고, 습관처럼 성격을 문제 삼았다.

'내성적' 요즘 말로 대문자 I라서 벌어진 문제는 너무 많았다. 언제부터 내가 내향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낯을 가리고 도망가고 새 학기마다 친구를 어떻게 사귀나 항상 걱정하며 살았다. 다만 어린 시절엔 내성적인 문제가 큰 어려움으로 이어지진 않았을 뿐이다. 새 학기만 되면 '나는 소풍은 누구랑 가나, 수학여행은 누구랑 가나, 밥은 누구랑 먹나.. '등등 을 수많은 고민으로 3월을 보냈다. 그러나가 4월 중순쯤, 누군가와 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휴~ 다행이다. 일 년은 친구랑 지낼 수 있겠구나" 이랬다. 물론 여러 가지 문제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혼자 지내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거는, 이제 구석에서 울고 있는,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를 챙겨 줄 사람은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나는 1993년 11월 어느 날 파리로 떠났다. 20대 초반 첫 해외여행? 유학?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한국을 떠난 본 적 없었다. 내가 파리를 떠났을 때는 이제 막 해외 자유여행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사람들은 파리를 예술의 도시라 했다. 누구도 파리에 가보지 못했고, 친구들은 파리로 가는 나를 부러워했다. 낭만의 도시로 떠나다니! 나는 그들의 설렘을 모두 안고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 도착하면 몽마르트르 언덕에 앉아 어둠 속 빛나는 에펠탑을 바라보고, 센 강가을 거닐 것이다. 그러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처럼 출구 없는 사랑이 찾아온다면? 상상만으로도 황홀했다. 그렇다. 파리는 나에게 예술 그 자체였고, 환상이었다. 나도 안다. 환상이란 게 원래 깨지라고 있는 것을. 설마 내가 그것도 모르겠는가! 그리고 환상이 크면 클수록 실망도 크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내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나도 안다. 다만... 환상이 너무 빨리 깨졌을 뿐이다. 어느새 나의 예술은 온대 간데없었다.


‘적응부터 하자… 타국이라서 낯설어서 그런 걸 꺼야… 참! 나 원래 한국에서도 적응을 빨리 못했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


혼자 되새기기를 수백 번…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나는 낯선 곳 낯선 얼굴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머릿속은 이미 하얬다.


언제부턴가 한국의 사회 분위기는 이런저런 정신적 어려움을 병명으로 쉽게 표현했다. TV에서 누군가가 ‘나는 공황장애다’라며 당당히 말하는 것도 보았고, 자신의 우울증을 고백하며 약을 먹고 있다는 스타들의 이야기도 종종 들려왔다. 하지만 내가 파리로 떠났던 1990년대만 해도 <우울증>이란 말은 일상 용어가 아니었다. '우울하다'란 말을 사용했으나 진단된 병명을 쉽게 밝히며 자신이 우울증 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드러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어떤 친구가 나 오늘 좀 우울하니 어디 가서 기분 좀 풀고 싶다고 말했다면, 최근 즐겁게 논 기억이 없으니 제발 나랑 신나게 놀자 정도로 해석했다. 내 해석이 너무 단순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친구들은 놀고 나면 괜찮아졌다. 그런 시절에 누군가 자신의 낯가림이 문제가 되어 사회 활동이 어렵다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했을까. 그것이 나를 괴롭힐 때면 나는 나를 비난했다. 너만 힘든 거 아니다, 애처럼 징징 대지 말아라. 나 조차도 내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문제를 덮어버렸고, 한참을 지나서야 그 문제의 뚜껑을 열 수 있었다. 뚜껑을 일찍 열었더라면 이상한 어른으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좀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수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어떤 모습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쩜 나도 어느 지점까지는 잘 지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건 이후 성격이 변한 건지 아니라면 타고난 성격인지 확실한 건 없었다. 성격은 한 가지 요소로만 만들어지는 건 아니니 쉽게 결론 내릴 수 없었다. 다만 한국에서 태어나 지낼 땐 내 문제가 타인에게 심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고군분투했다. 이런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그 문제를 깊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누군가 먼저 손 내밀어 준 사람이 있었으며, 어려운 고비만 넘기고 나면 너무나 잘 지내는 그런 아이였다. 그것도 너무~ 그러니깐 아는 사람들과는 까불까불 웃기기도 하며 잘 지내는 사람이 나였다. 좀 웃기다는 소리도 종종 듣는 아이. 가까운 친구들 조차 내 어려움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낯가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더 심해졌다. 아니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게다가 타국에서의 낯섦은 크게 한 방 맞은 듯 충격이 컸다. 낯선 도시 파리에서 낯선 동양 여자에게 먼저 손 내밀어 줄 사람은 없었다. 혹 먼저 손 내밀어 준다 한들 나는 그 손마저 낯설어 잡지 못했을 거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장난감 가게에 가는 횟수는 늘어났다. 그곳에 가면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기억이 사라 질 때면 다른 하나가 떠올랐고, 그 기억이 흐릿해질 때쯤 또 다른 기억이 기포처럼 떠올랐다. 그곳에서는 낯섦도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나를 보고 있는 그들이 좋았다.

누가 알겠는가 모든 인간이 마음껏 놀고 나면 마음의 병이 사라질지 말이다.

나는 아이가 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은 에펠탑에 매일 들러 식사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에펠탑을 너무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 했지만, 그는 흉측하게 생긴 에펠탑을 피할 유일한 장소로 에펠탑 안을 선택했다고 한다. 에펠탑이 안 보이는 유일한 장소. 좀 황당한 답 같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마 그는 그곳에 앉아 있는 동안은 에펠탑이 보이지 않으니 편안했을 것이다. 내가 장난감 가게에 있을 때 편안하듯이 말이다. 다만 그와 내가 다른 점은 모파상은 보기 싫은 에펠탑을 피하기 위해 에펠탑 안으로 정면 돌파했고, 나는 회피했다는 것이다. 문제를 피해 장난감 가게에서 영원히 살 수 없었다. 또 장난감 가게에 머물고 돌아갔다고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았다. 나에겐 뭔가 새로운 결심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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