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남겨보자.
여기에도 남겼지만 올해 초 난 다시 스타트업으로 돌아왔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대기업이라 불리는 이전 직장이 너무 재미없었다. 절차는 많았고 진행은 힘들었다. 무엇보다 금융이라는 답답한 테두리가 너무도 견고한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고, 더 좋은 조건과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다시 스타트업으로 오게 되었다. (늘 기대를 갖는다, 그리고 늘 기대처럼 되지 않는다.)
처음으로 한 회사의 디자인을 총괄하는 관리자가 되었다. 뭐든 처음은 어색하다. 실무와 관리의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수많은 미팅을 해야 했다. 디자이너들 개개인의 역량과 목표를 파악해야 했고 진행상황의 체크는 그 어느 업무보다 중요한 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신없었던 이 일도 어느 순간부터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회사의 규모가 갑자기 커져버린 터라 조직 문화 관점에서 개선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제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스타트업으로 이직의 목표는 관리자로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할 때, 회사의 상황이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이직 선택의 책임은 나에게 있지만 이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고민은 딱 하나였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같이 진행해보자는 회사의 제안은 고마웠지만 앞으로의 회사의 비전과 계획이 100% 공감되지 않았다. 51:49의 기대치를 가지고 하루에도 여러 번 고민했다. 물론 고민만 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무덤덤하게 넘겨왔던 이직 제안에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몇 번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회사가 궁금해서, 잘 알고 있었던 서비스라서, 좋은 비전을 가지고 있어서 진행하였고 면접의 목표는 더 좋은 비전을 가진 기회를 찾는 것이었다. 새로운 디자이너, 경영진과의 대화도 즐거웠고 의미 있었지만, 마지막 면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무언가 순서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가지고 있었던 이직 목표를 시도라도 해본 것일까?
그 결과를 얻지 못한 채 다른 기회를 찾는 게 맞는 것일까? 대답은 ‘no’였다.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난 지금의 회사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내 목표가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적어도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점, 포트폴리오의 한 장을 채울 수 있을 때까지는 이 회사에서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볼 생각이다. 여러 일정 이슈로 당장은 진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외의 업무들을 나름 재미있게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난 뒤 지금 선택의 결과를 즐거운 마음으로 남겼으면 좋겠다.
(씁쓸한 마음이어도 남기긴 할 거 같다. 뭐라도 남겼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