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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otany 니오타니 Apr 05. 2022

감정의 은신처

휴직 일기





나는 예민하다. ‘감각’과 ‘감정’ 모두가 예민한 편이다. 예민한 감각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우선 청각이다. 소리에 쉽게 피곤해진다. 큰소리가 울리는 공간, 특히 클럽이나 노래방에서 한 시간 이상 있다 보면 거의 탈진 상태가 된다. 악기도 전자음이 아닌 어쿠스틱을 좋아한다. 가요도 발라드나 클래식이 편안하다. 클래식 중에서도 피아노 협주곡을 제일 좋아한다. 이 예민한 감각 때문에 20대에 클럽을 딱 두 번만 가본건 지금도 억울하고 아쉽기만 하다. 고기 냄새에 민감해서 한국인의 보양식 곰탕 냄새를 견디지 못했다. 어릴 때는 겨울이면 내내 고아대는 고기 냄새를 피해, 코를 막고 밥을 먹거나 식구들이 먹고 난 후 따로 밥을 먹었다. 까탈스러운 내 후각은 바다에서 나는 모든 비린내에는 또 한없이 관대하니 예민함은 좋아함만 같지 못한 것인가 싶다. 


감각도 예민하지만 감정도 그렇다. 어느 한 사람에게만 예민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내 주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가 그대로 느껴지고 짐작이 된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사람도 눈에 잘 들어오고, 미루어 짐작해서 미리 마음을 쓰기도 한다. 동네 지하철 1번 출구에 서 있는 빅이슈 판매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아파트 정문 입구에 트럭을 대놓고 모두지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소쿠리를 파는 할아버지 때문에 한광주리의 소쿠리를 사들고 간다. 좋은 일을 해야겠다거나 도와줘야겠다거나 이런 호혜적인 생각보다는 그냥 지나쳤을 때면 도무지 마음이 편하질 않다. 이 정도면 감각의 과잉상태다. 


이런 자극이 피로가 되고 차곡차곡 쌓여 극에 달할 때면, 스위치를 끄는 시간이 필요하다. 엄마는 이런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신다. 학창 시절엔 일 년에 하루쯤 학교 가지 않고 땡땡이를 칠 수 있는 공식적인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셨다.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어느 날 나는 하루 종일 잠을 자거나, 보고 싶은 책이나 만화를 마음껏 보며 좋아하는 김밥을 먹으며 뒹굴거렸다. 그 휴일 날이 일 년에 10번 보는 모의고사 중 하루였다. 매월 되풀이되는 모의고사를 여섯 번쯤 치르고 나면 내 안의 에너지가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한 번쯤은 되풀이되는 사이클에서 내려와 나를 다시 점검하고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휴식은 하루였지만, 그 하루 휴식으로 나는 두 달 이상의 호흡으로 다음을 준비할 수 있었고, 일 년 동안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어른이 되면서 스위치를 끄고 쉴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휴일에도 일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쉬기 위해선 집중할 다른 일이 필요했다. 사진 찍기, 베이킹, 가드닝, 클라이밍, 가죽공예, 커피, 여행 등 수많은 취미는 사실은 예민한 내 감정의 은신처였다.  액티비티로 충족되지 않을 때는 장소를 바꿔주었다. 내 삽십대는 제주도에 빠져 지낸 시기여서, 어느 한 해는 제주에 연세 집을 얻어놓고 휴일이나 휴가 때 지내기도 했다. 십 년 전 어느 날 출근길에 퇴사를 결심하고 바로 실행했던 것도 중간에 스위치를 끌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해 너무 지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의식적으로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노력만으로는 부족한 순간이 또 찾아오고 있다. 외부의 변화와 내 생애주기의 변화와 겹쳐서 오는 이 파장은 잠시의 휴식과 도피로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이런 순간이 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십 년 전처럼 이번에 무작정 퇴사를 할 수는 없다. 내 머리를 꽉 채운 일에서 벗어나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 주변의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 보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휴직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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