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수업 모델로는 내용 중심 수업(Content-Based Instruction)을 선정했다. 지도안의 수업 설계 동기에 최근 발표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보고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기후위기 교육의 필요성을 써내려갔다. 기후위기에 대해 영어로 공부한다면 어떤 내용을 알아야 할까? 언어 기능 학습과 내용 학습이 모두 담길 수 있도록 교육과정 재구성을 해야 했다. 총 4차시 수업으로 구상해보기 시작했다. 첫 차시에선 기후위기와 관련된 주요 어휘를 학습한 후, 독해 활동을 통해 다섯가지 소주제(이상기후현상 증가, 팬데믹 증가, 식량위기, 해양 종다양성 파괴, 기후난민 증가)를 배우며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필요성을 이해한다.
두번째 차시에선 탄소발자국의 개념을 학습하고 듣기 활동을 통해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방법을 알아본다. 그런데 듣기 활동을 위한 영상을 고르다 보니 어휘 수준이나 영상의 길이는 적당했지만, 내용이 별로였다.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하고 카풀을 하란다. 그것을 대한민국 십대가 어찌 하는가? 그래서 청소년도 실천할 수 있는 방법 다섯가지를 골라 각각에 대한 짧은 독해지문을 만들었다. 조별로 한 지문을 맡아 학습한 후, 다른 조와 공유하며 학습지의 빈칸을 채우는 조별활동을 구상했다. 다섯가지 방법 중 고기 소비 줄이기와 제로웨이스트를 포함시켰다. 여기서 가장 효과적으로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방법으로서 비거니즘을 소개하며 수업을 마무리한다.
세번째 차시에선 조별로 첫 시간에 배운 다섯 가지 소주제 중 가장 흥미로운 주제를 선정하여 추가적으로 조사한다. 마지막 차시엔 조사하며 알게 된 사실 세 가지와 더불어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학급 전체가 일주일 동안 실천할 방법을 제시하는 조별 발표활동을 진행한다. 발표가 끝나면 투표를 하여 가장 효과적인 목표를 제시한 조를 선정하고, 학급이 다 같이 일주일간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보기로 한다.
연구수업으로는 두번째 차시를 발표하기로 했다. 수업 진도 일정을 짜보며, 적당한 날짜를 잡아 연구부장님께 말씀드렸다. 결재가 올라갔고, 나의 연구수업 참관 날짜와 시간을 알리는 전체 업무 메세지가 뿌려졌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한다. 반드시 정해진 날짜에 그 수업을 할 수 있게끔 매시간 바삐 진도를 나갔다. 아이들이 나의 다급한 마음을 아는지 잘 따라온 덕에 진도는 밀리지 않았고, 계획했던 수업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연구수업 날이 되었다. 여차하면 확진자가 발생해서 원격수업으로 전환되어 수업이 미뤄질 수도 있었다. 어느 날은 차라리 미뤄지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조회시간부터 긴장한 탓에 학생들에게 교실 바닥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여러 번 강조하며 분주하게 창틀에 널브러진 손걸레와 칠판 지우개를 정리했다. 틀려도 되니까 질문에 많이 대답해달라며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학생들과 뒤에 선생님들이 앉으실 의자를 함께 준비했고, 정성 들여 만든 수업지도안이 의자에 하나씩 올려졌다. 수업을 녹화할 캠코더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다른 영어선생님들 앞에서 영어로 수업을 하려니 긴장하여 조금씩 버벅거렸다. 영어 전공자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게다가 아침이면 더더욱 영어가 안 나온다! 뒤에 선생님들이 많이 와 계시니 학생들도 덩달아 긴장해보였다. 긴장을 덜어내려 애쓰며 지난 시간 학습한 어휘를 복습했고, O/X 퀴즈로 학습 내용도 상기시켰다. 학생들도 담임이 긴장한 게 보였는지 어느 때보다 열심히 대답을 해주었다. 서서히 영어 버퍼링도 잦아들고 호흡도 일정해졌다.
듣기 활동을 지나 조별 독해 활동까지 무탈히 흘러갔다. 학생들은 옆 조에 가서 알게 된 내용을 모집단에 돌아와 공유하며 학습지의 빈칸을 채웠다. 학습지엔 다섯 개의 빈칸이 있었고, 조별활동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그 중 세 개의 빈칸을 채우게 된다. 나머지 두 개의 빈칸도 채우기 위해 PPT로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다섯 가지 방법을 갈무리하며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제로웨이스트를 설명하면서는 내가 쓰고 있는 대나무 칫솔과 고체치약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고기 소비 줄이기를 설명하며 비거니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사실 지난 2년간 환경과 동물권을 위해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동안 만든 요리와 식당에서 먹은 음식 사진을 보여주었다. 리액션 천재인 학생들이 “우와!” 하며 사진을 구경했다. 비건이 샐러드만 먹는게 아니며 맛있는 비건 음식이 차고 넘친다고 보여주니, 괜히 뿌듯했다. 사진 속에는 내가 만든 카레, 떡볶이부터 비건 식당과 카페에서 먹은 버거, 파스타, 케이크 등이 있었다. 비건이 되기 어렵다면 일주일에 한 번만 고기를 먹지 않아도 탄소발자국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통계자료와 함께 설명하며 “Meatless Sunday[1]”를 제안했다. 그리고 비건 운동선수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고기를 먹지 않아도 충분히 건강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비건임을 아셨던 선생님들도, 모르셨던 선생님들도 모두 관심을 가지며 경청해주셨다.
다행히 준비했던 수업 활동을 모두 시간 내에 마칠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치자, 지난 몇 주간의 고민이 사르르 없어지는 것만 같아 홀가분했다. 아이들에게 열심히 참여해주어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교실을 정리했다. 참관 오셨던 선생님들께선 교실을 떠나며 고생 많았다며 격려해주셨다. 상기된 얼굴로 교무실에 돌아와 마지막 긴장까지 날숨에 실어 보내고는, 선생님들께서 남겨 주신 참관록의 피드백을 읽어보았다. 교육과정 재구성에 들인 노력과 시간을 알아봐주셔서 기뻤고, 무엇보다 기후위기와 비거니즘에 대해 알게 되어 좋았다는 내용들이 있었다. 그 어떤 칭찬보다 좋았다.
연구수업이 끝나고 몇 주 뒤, 4반 교실에 들어가니 벽에 큰 전지 다섯장이 붙어있었다. “선생님! 이거 읽어봐 주세요! 진로 수업 시간에 엄청 열심히 한 거에요!” 창업 아이디어 구상하기 조별 활동이란다. 한 조는 아침을 굶고 오는 학우들을 위해 푸드트럭 사업을 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알록달록 그려넣은 메뉴판을 보니 치킨, 햄 샌드위치 옆에 비건 샌드위치도 있었다! 기뻐서 펄쩍 뛰었다. 얼마 후 영어과 회식이 다가왔을 때는 한 영어선생님께서 나도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는 곳에서 시켜먹자고 먼저 말씀해주셨다. 학교에 비건 앨라이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진작 이야기할 걸!’ 내가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이유와 두려움들이 있었지만, 말하지 않을 이유보다 말해야 할 이유가 훨씬 많았음을 깨달았다. 내가 비건이라고 선언하는 일은, 주변 타자들의 세상의 풍경에 하나의 비건 존재를, 비거니즘이라는 조각을 새겨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비건 앨라이를, 비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교사로서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비건 세상 만들기는 교실에서 시작된다. 가정법 과거 구문을 설명하기 위한 문법 학습지를 만들며 예문을 고민해본다.
“If I were a hen in a battery cage, I would …”
[1] 원래 2003년 시드 러너 교수가 시작한 “Meatless Monday” 운동이지만, 월요일에 급식을 먹어야 하는 아이들의 현실을 생각하여 Meatless Sunday로 바꾸어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