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어린이 박지은은 몸 쓰길 지독히도 싫어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모든 일기를 보관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1~2학년 때 일기장에 토로한 내 인생의 시련은 역설적이게도 일기였다. 일기를 매일 쓰는 것이 싫다는 것을 주제로 일기를 썼다. 3학년부터는 내 인생에 일기 아닌 다른 시련이 생겼다. 바로 태권도다. 그 해 태권도장을 다니기 시작하며 태권도가 얼마나 싫은 지 써 놓은 일기들이 가득하다. 뜀틀을 넘지 못해 도장 친구들 앞에서 망신당한 날에는 뜀틀에 악마의 얼굴을 그려 넣은 그림일기를 썼다. 그날 1, 2학년 동생들도 다 넘는 뜀틀을 혼자만 넘지 못해 놀림받은 나는 겨우 울음을 참으며 집에 갔다.
태권도, 수영 등 어릴 때 운동을 조금씩 배우긴 했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자전거, 달리기, 뜀틀, 철봉 등 운동은 그냥 다 싫었다. 엄마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태권도장에 간 첫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합을 더 크게 넣으라는 관장님 호통에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하루 같은 한 시간을 보냈다. 자전거는 아홉 살 때 크게 넘어져서 앞니를 잃을 뻔한 뒤로는 스물두 살까지 타지 않았고, 체육 시간에 달리기를 하면 단연코 꼴찌였다. 철봉 매달리기는 10초를 넘긴 적이 없다. 잘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패배의식조차 느끼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한사코 나의 것은 아니라 거부했던 많은 것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중엔 비거니즘 말고도 운동이 있다. 교직 첫 해에 일에 치여 수명이 짧아질 것 같단 위기감에 운동을 시작했지만, 이젠 운동 갈 생각에 퇴근이 기다려진다. 퇴근하면 살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운동하는 데 쓴다. 3년 간 필라테스와 달리기를 하다 족저근막염이 생기고선 작년부터 일주일에 두 번은 요가, 한 번은 실내 볼더링[1]을 한다. 주말에 아빠와 시간이 맞으면 지롱이[2]를 타고 함께 라이딩을 간다. 바쁘고 피곤해도 운동하는 시간만큼은 확보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친구가 없는데 더 없어진 것도 같다. 그래도 몸 쓰는 일은 즐겁다. 비거니즘을 시작한 후로는 특히 더 그렇다.
모든 운동엔 각자의 매력이 있다. 나에게 셋 중 가장 어려운 것은 요가다. 아마 완성 혹은 도착이란 개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요가는 클라이밍처럼 탑을 찍고 내려오거나 자전거처럼 목적지에 도착하는 운동이 아니다. 몸의 감각과 내면에 오롯이 집중하는 데는 완성도 도착도 없다. 요가를 처음 시작했을 때 장시간 집중력과 유연성뿐만 아니라 근력도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연성이 필요한 동작을 하려면 단지 유연해선 안 되고 근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깊은 전굴이나 후굴을 하려면 근육을 사용해 가동범위를 늘리기 위한 공간을 만들고 중심을 잡으며 자세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요가를 할 땐 말이 아닌 몸의 세계로 진입한다. 온종일 말에 둘러싸여 있다 몸으로만 세계를 감각하는 순간, 나는 존재의 복잡함을 벗어던지고 파르르 떨리는 살들의 물성으로 축소된다. 스스로가 보잘것 없어지는 데서 해방감을 느낀다. 호흡 명상을 하며 몸에 숨이 채워지고, 비워지는 것을 의식해본다. 숨을 갈비뼈에도 담아보고, 엎드려 있을 때는 등에, 때로는 겨드랑이 아래에, 때로는 골반에, 때로는 온몸에 담아본다. 땅에 딛고 있는 발의 아치, 뒤꿈치, 발가락 하나하나를 느껴본다. 나에게 발가락이 있었구나, 팔꿈치가 있었구나, 날개뼈가 있었구나, 존재조차 망각했던 몸 곳곳에 의식을 데려가면 나는 대단해지고 싶은 욕심에서 내려와 대단할 필요 없는 하나의 따뜻한 살덩이가 된다.
어떤 아사나는 쉽게 하는 반면, 어떤 아사나는 여전히 힘들다. 같은 동작도 왼쪽으로 할 때는 잘 되지만, 오른쪽으로 할 땐 잘 안 된다. 선생님은 나의 몸 상태를 의식하고, 고통과 자극을 구분하라 말씀해주신다. 그 안내에 따라 우짜이 호흡[3]을 수련의 끝까지 가지고 가려 집중해보지만, 무척 어렵다. 자꾸 딴생각이 든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해야 할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호흡은 엉망이 된다. 힘든 아사나에선 깊은 자극 때문에 나도 모르게 숨을 참는다. 다시 호흡에 의식을 데려가면 호흡이 깊어짐에 따라 조금씩 관절의 가동범위가 늘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틀어지고 치우친 몸과 마음의 정렬을 찾아가는 일에는 끝이 없어서 다음 수련이 기다려진다. 여든이 돼도 요가를 하고 싶다.
반면 클라이밍은 문제를 풀어 성취해내는 재미가 명확한 운동이다. 난이도에 따라 구별된 색테이프로 문제의 스타트와 탑이 표시되어 있다. 스타트 홀드를 잡고 발이 땅에서 떨어지면 시작이다. 탑 홀드까지 지정된 홀드들과 벽면만을 이용하여 도착하는 것을 “문제를 풀었다”라고 말한다. 문제를 첫 시도만에 풀어내는 것은 “온사이트”라고 한다. 평소에 풀던 것보다 어려운 문제를 “온싸” 한 날이면 암장을 나올 때 날아갈 듯 기분이 좋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런 날은 그리 많지 않다. 클라이밍을 좋아하는 것만큼 잘하지 않고 실력도 아주 더디게 늘고 있다.
소심한 사람에게 클라이밍은 쉽지 않다. 나는 소심하고, 그래서 어렵다. 클라이밍은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하찮은 실력을 보여야 하고, 또는 내가 낑낑대며 못 푸는 문제도 쉽게 해내는 고수들을 보며 하염없이 비참해질 가능성이 농후한 운동이다. 게다가 내가 풀고 싶은 문제와 루트가 겹치는 것을 풀려는 사람들이 많으면 영 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한다. ‘이때다’ 하고 매트 위로 발을 들이밀다 누군가 더 크게 성큼 하고 등장하면 나는 “흐흐흐 먼저 하세요” 하며 쭈뼛쭈뼛 물러난다. 유독 문제가 안 풀리는 날에는 벽 위를 날아다니는 고수들 앞에서 잔뜩 풀이 죽어버려서 평소에 되던 것도 안 된다. 클라이밍을 하며 나는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풀이 잘 죽는 사람이란 걸 매번 알게 된다.
클라이밍은 근력뿐만 아니라 머리를 많이 쓰는 운동이다. 루트를 잘 탐색하면 훨씬 적은 힘을 들이고도 탑에 도착할 수 있다. 루트 파인딩이 안 될 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힘이 부족하거나 무게중심을 찾지 못해 휘청이다 떨어진다. 가만히 앉아 벽을 뚫어지게 보며 어떻게 가야 도착할까 생각하다 보면 세상만사 복잡한 일들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내적 유레카를 외치고 루트를 찾아 마침내 문제를 풀어낼 때의 쾌감은 아주 짜릿하다. 문제를 풀거나 어려운 무브를 성공하면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나이스!”를 외치며 박수를 쳐주는 클라이밍 세계만의 정다운 문화도 좋다. 언젠간 나도 대범한 마음으로 스파이더맨처럼 벽 위를 날아다니길 바라며 꾸준히 암장에 기웃거린다.
가장 늦게 시작한 운동은 자전거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전거를 산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이다. 2년 간 살지 말지 고민하다 올봄에 입문용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업어왔다. MTB(산악자전거)와 로드바이크의 특성을 합하여 하이브리드다. 손잡이는 MTB처럼 높고 일직선으로 뻗어있지만, 로드바이크처럼 바퀴도 얇고 자전거 무게도 비교적 가볍다. 매일 서울시 따릉이만 타다가 지롱이를 타니 삐걱거리는 소리 없이 앞으로 쌩쌩 나가고 언덕도 힘차게 올라가는 것이 기특하고 장하다. 자꾸만 지롱이가 잘 있나 하고 현관을 보게 된다.
자전거를 타면 걸을 때, 운전할 때와 다른 세상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매일 가던 출근길도 자전거로 가면 전혀 달라 보인다. 가장 큰 묘미는 맞바람과 언덕이다. 맞바람이 불거나 언덕을 만나면 허벅지가 터질 것만 같다. 힘에 부치기 시작하면 시야가 점점 짧아진다. 언덕과 바람에 굴복하고 속도를 늦춰서야 비로소 잠시 놓쳤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전거 고수들은 느린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옆으로 빠르게 추월해버린다. 그들이 스치며 남기고 간 바람을 맞으며, 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느낀다. 굴복하고 지는 것의 재미를 너무 이른 나이에 배운 건 아닐까 싶어 가끔 걱정이다. 건강검진에서 심혈관 나이는 25세로 나오는 걸 보니 자전거 덕에 몸은 청춘이고 마음은 불혹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내가 비건이라고 하면 꼭 건강 박사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건강에 대해 아는 모든 지식을 쏟아내며 우리 부모님보다 내 생존을 더 걱정해준다. 내 왜소한 체구를 보며 가뜩이나 힘없는데 잘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고맙지만 안 고맙다. 내 건강은 내가 제일 걱정하니, 그 이상의 걱정은 세상 걱정 총량의 낭비라고 본다. 난 비건이 된 후 근골격량도 늘고, 운동 수행력도 좋아졌다. 5km를 6km/h 정도의 속도로 쉬지 않고 뛸 수 있고, 자전거 40km 정도는 큰 무리 없이 탈 수 있다. 이만하면 병약한 사람은 분명 아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피로감도 훨씬 덜하고, 이따금씩 날 괴롭히던 대왕 여드름의 출현도 부쩍 줄었다. 채수의 힘은 이리도 맑고 강하니 육수 한 방울 부럽지가 않다.
남의 살을 먹지 않으면 건강할 수 없을 것이란 “고기 신화,” 단백질을 많이 먹을수록 좋다는 “단백질 신화”는 내겐 그야말로 “신화”지만, 아직 대부분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논리이다. 하지만 곡류, 콩류, 해조류, 채소류, 과일류, 견과류, 씨앗류를 골고루 섭취하면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얻을 수 있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을 합성하여 만들어지고, 식물성 음식에도 모든 종류의 필수 아미노산이 있기 때문이다. 골고루 잘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4]. 비건은 도대체 뭘 먹고 사냐고 물으면 먹을 게 너무 다양해서 대답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콩과 채소의 종류만 해도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가 없다!
나는 무척 건강하지만, 건강하다는 말은 아프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건강한 사람도 종종 염증이 생기고, 무리하면 다치고, 스트레스 받으면 체하기도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비건이 되고선 아픈 날이 줄었고, 아파도 전보다 빨리 회복된다. 혈관을 맑게 해주는 채수의 힘이 크겠지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비거니즘이 내 몸에 대한 인식을 바꾼 덕도 크다. 무얼 먹어야 할 지에 관심을 가지니 몸을 섬세하게 살피고 돌보는 일에 정성을 들이게 되었다. 무리하고 과로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내가 몸의 말에 귀 기울이며 아프지 않도록 “적당히” 열심히 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지구를 잘 돌보고 싶은 마음과 나를 잘 돌보고 싶은 마음은 무한히 서로에게로 옮아간다.
정성 들여 돌본 몸으로 머리서기를 하고, 암벽에 매달리고, 페달을 힘껏 밟을 때마다, 이 단단함의 기원을 떠올린다. 내가 먹은 식물이 뿌리내린 흙과, 그 흙을 적신 물과 식물을 키워준 햇살과 바람을 생각한다. 흙, 물, 햇살, 바람이 내 살과 뼈에 깃들어 있음을 문득 자각한다. 내가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땅이라는 연결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난 어떤 외로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한없이 경솔한 내 모습이 싫어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날에도, 채수의 힘을 써보면 나도 채소의 맑고 깨끗함을 조금은 닮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생의 남은 밤들에도, 내 몸의 단단함에 타자의 죽음이 깃들지 않았다는 안도감으로 평온히 잠들고 싶다. 그렇기에 내 몸과 같은 이 땅에서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거나 쓰고 버리고 싶지 않다. 이 땅과 같은 내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기 위해, 무해하게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꾸준히 고민하며 살고 싶다. 이제 내게 비거니즘은 단순히 무얼 먹고, 먹지 않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오늘도 부지런히 채수의 힘을 쓰며, 규칙과 이론이 아닌 실천의 언어로 비거니즘을 만나본다.
[1] 스포츠 클라이밍의 종목 중 하나로 보조 장비 없이 암벽에 오르는 등반이다. 볼더링 외에는 빠르게 올라가 기록을 세우는 스피드, 로프를 매달고 15m의 높은 벽을 올라가는 리드가 있다.
[2] 나의 자전거 이름이다. 처음에는 지은이와 따릉이의 합성어인 지릉이로 지었으나, 어감이 유쾌하지 않아 ‘릉’자를 양순모음 ‘롱’으로 바꾸어 지롱이가 되었다. 이 변화에는 짝꿍이 기여한 바가 크다. 이름에 자전거의 활기찬 느낌이 잘 담긴 것 같아 만족스럽다.
[3] 횡격막을 이용한 깊은 호흡
[4] 고기에서만 얻는 영양분으로 알려진 비타민 B12 역시 동물 자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식물 뿌리 사이에 사는 토양 박테리아만이 만들어낸다. 보충제, 시리얼, 두유와 같은 비타민 B12 강화식품을 섭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더욱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마르타 자라스카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의 3장 ‘만들어진 신화, 단백질’을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