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2016년 1월, 네덜란드에 살 때의 일이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작은 캐리어와 배낭을 들고 기숙사를 나선다. 밤 사이 축축하게 젖은 자전거의 안장을 소매로 대충 닦고 자물쇠를 풀어 자전거에 올라탄다. 네덜란드에 산다는 것은 자전거를 한 손 떼고, 아니 혹은 양손을 다 떼고 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에서 본 최고의 장면은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는 핸드폰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맥주 한 박스를 든 채 자전거를 타는 남자였다. 안타깝게도 한국에 돌아오는 그날까지 양손을 다 놓고 타는 법은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한 손만으로 자전거를 잘 탈 수 있게 된 덕에, 왼손으로는 캐리어를 끌고 오른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은 채로 천천히 안개를 헤치며 기차역으로 향했다.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타 핸드폰에 저장된 파리 행 탈리스 기차표를 재차 확인했다.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가 있는 친구와 파리에서 만나 같이 여행을 하기로 한 날이다. 한 달 전에 미리 예약한 탈리스 티켓을 손에 쥐고 들뜬 마음으로 미리 다운 받아 놓은 김사월의 <수잔> 앨범을 틀었다. 두 시간을 타고 가면 암스테르담에 도착하고, 암스테르담에서 두 시간 반 동안 탈리스를 타면 파리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야 내가 예약한 기차는 파업해서 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안내데스크에 어떡하냐 물어봤더니, 파업을 해서 어쩔 수 없단다. 한 달 전에 예약한 티켓이라고 했더니, 직원이 파업은 원래 갑자기 한다고 퉁명스럽게 말해주었다. 파리에 꼭 가야 하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었더니 표를 교환하는 창구로 안내해주었다. 아마 파리에 갈 수 없을 거란 말을 얄밉게 덧붙이면서.
창구 직원은 상당히 불친절했고, 별 일도 아닌데 유난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응대했다. 자, 이제 나에게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를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다섯 시간 기차를 타고 벨기에의 한 도시로 간다. 거기서 기차를 갈아타 프랑스 북부에 있는 또 다른 처음 들어보는 도시로 간다. 거기서 다시 파리로 가는 기차로 갈아탄다.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일곱 시간 뒤에 파리에 도착할 수 있다. 기숙사에서 출발한 시간부터 따지면 열 한 시간이 걸리는 여정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비행기로 여덟 시간이면 한국에 갈 수 있다. 이 세 장의 티켓 값을 합치면 대략 십오만 원이다. 한 숨이 나왔다.
하지만 얼마나 기다렸던 파리 여행인데, 파리의 바게트와 크로와상을 맛봐야 하는데, 친구가 기다리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하는 수 없이 그 말도 안 되는 여정의 티켓을 샀다. 셀룰러 데이터 없이 와이파이에 의존해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명선에게 연락할 기회가 없다. 서둘러 명선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나의 도착 예정 시간과 함께, 기차를 타는 동안은 데이터가 없어 연락할 수 없으며(그렇다, 유럽의 대부분 기차는 당시 와이파이가 안 터졌다) 혼자 놀고 있으라고 메세지를 남기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벨기에 어딘가를 달리던 중, 검표원이 내 표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젓는다. 지금 이 기차는 이 표에 쓰여 있는 역까지 가지 않는단다. 당장 내려야 한단다. 왓 더 헬! 이대로 파리를 포기해야 하는가. 두 달 전에 혼자 벨기에 여행을 온 적이 있다. 그래, 참 아름다운 곳이었지. 그냥 여기까지 온 것에 만족하고 벨기에를 구경하다 돌아가야 할까. 수많은 생각이 스치는데 마침 뒤에 한 미국인 가족도 나와 같은 상황인지 검표원과 싸우고 있었다. 옳거니, 저들이 나의 구원자이니라. 생존을 위해선 내향인도 외향인이 되는 법,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혹시 파리 가세요? 저도 암스테르담에서부터 왔는데, 지금 여기서 내리라네요.”
“그러니까요. 우린 내려서 택시 타고 프랑스에 가려고요. 같이 탈래요?”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일행과 함께 벨기에 어딘가에서 택시를 타고 국경을 넘어, 프랑스 북부의 어떤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들이 가진 돈은 달러뿐이라 우선 내가 가진 유로로 20만 원 정도 되는 택시비를 내기로 했는데, 가는 내내 사기를 당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기차역에 내려 환전소에서 돈을 돌려받고 나서야 안심하며 파리로 향했다.
여기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여행 에피소드다. 탈리스 파업은 한동안 친구들에게 가장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닌 나의 위기 극복 서사였다. 무슨 일이 생겨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교훈과 함께. 그러나 지금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삶의 속도에 대한 이야기다.
기차 파업은 처음 겪어본 일이라 무척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날 암스테르담 기차역의 풍경은 꽤나 평화로웠다. 파업은 그들에게 상당히 흔한 일이기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익숙하다는 듯 발길을 돌렸다. 물론 나처럼 짜증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누군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가끔 기차를 못 탈 수 있다는 것, 계획대로 일정이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만 같았다. 그들의 삶의 속도에는 그 가능성이 반영되어 있달까. 그날, 그동안 내게 익숙했던 것과 퍽 다른 삶의 속도도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게 익숙했던 삶의 속도란 것은…
많은 현대인이 그렇듯, 나는 끊임없이 늘어선 “해야 할 것들”을 부지런히 해나가며 살았다. 슈퍼마리오 게임 속 캐릭터처럼, 직선으로 곱게 뻗은 시간 위에서 다음 퀘스트를 깨기 위해 멈추지 않고 앞으로 갔다. 바쁘지 않은 날이 드물었다. 늘 할 일 다음엔 또 다른 할 일, 일정 다음엔 그다음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살아있는 대부분을 끝없이 예고된 계획을 이행하는데 헌신했다.
마음잡고 공부를 시작한 고등학생 시절엔 턱 끝까지 숨이 차 있는 느낌을 견디며 살았다. 누가 시킨 적도 없지만, 악착같이 공부했다. 최선을 다 하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렇게 내 몸에 아로새겨진 속도는 대학에 가서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면 곧장 학교를 나와 김밥을 입에 밀어 넣으며 과외하러 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빠른 환승 구간을 미리 검색해 놓고, 다음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과외 시작 십분 쯤 전에 도착하면,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음악을 들으며 남은 김밥을 먹는 것이 휴식이었다. 밥 먹고, 쉬고, 자는 시간은 아껴야 하는 시간이었다.
뒤쳐지면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레이스 속에서 끊임없이 달렸다. 계획이 어긋나는 것은 곧 실패였다. 밀리고 늦는 것은, 다음 계획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건 내 부족함의 증거이자 꽤나 즉각적으로 다가올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예고이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생활비도 벌며 공부해서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직장을 갖기 위해선 계획에 차질이 없어야 했다. 지쳐서 달리지 못하는 날이면, 체력도 능력이라며 아픈 자신을 탓했다. 쉴 틈 없는 일과에 번아웃이 오면 조급한 성격을 탓했다.
비거니즘을 삶에 들여온 후, 나는 전과 사뭇 다른 속도로 살아간다. 물론 직장인이 되었다는 엄청난 변화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지금의 방식으로 시간의 우선순위를 재편한 것은 비거니즘이다. 손가락 몇 번을 움직이면 필요한 물건을 현관 앞까지 소환할 수 있지만, 퇴근 후 장바구니를 챙겨 장을 보러 간다. 간편하게 먹고 버릴 수 있는 190ml짜리 두유 대신, 950ml 팩에 담긴 두유를 텀블러에 덜어 도시락과 함께 챙겨 출근한다. 다 마신 두유팩은 활짝 펼친 후 깨끗이 씻어 말려 열 장이 모이면 제로웨이스트 상점에 가져간다 [1]. 귀찮다고 투덜대면서도 주중엔 설거지하고 도시락 싸는 일을 우선시한다. “아껴야 하는” 시간들은 이제 아끼지 않고 충분히 써야 마땅한 시간들이다. 걸음도 덩달아 느려졌다.
[1] 멸균팩(테트라팩)은 종이로 분리수거가 되지 않는다. 테트라팩을 수거하는 가까운 제로웨이스트 상점에 가져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