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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울 Sep 28. 2022

삶의 속도를 변주하며(2)

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Chapter 4. 실천의 언어 수집하기


세 번째 이야기. [삶의 속도를 변주하며](2)


  왜 밥상에서 시작된 변화는 나의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는 물건들 뿐만 아니라, 삶의 속도까지 바꾸었을까? 비거니즘은 단지 고기를 먹지 않고, 쓰레기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시선을 이동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물권을 외치는 이들에게 인권도 아직이라며 어깃장을 놓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동물이라는 타자의 고통을 헤아리는 감각을 일깨우면, 인간 타자의 고통을 더욱 내밀하게 상상하는 힘도 함께 자란다. 비거니즘은 중심부가 소외시킨 주변부를 인식하고, 그 견고한 이분법의 체계를, 지배와 정복과 착취의 언어를 전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류의 논리가 제멋대로 무용하다며 낮추고 마비시킨 공감의 능력을 회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동하는 시선을 따라가는 일은, 시간을 쓰는 방식, 즉 삶의 속도를 변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성과주의 규율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재촉하던 걸음을 늦추고, 소외된 존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간을 쓰는 일 말이다.


  종차별에 대한 각성이 인종차별, 성차별, 건강중심주의, 비장애중심주의를 더 잘 이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어지자, 인간과 비인간 동물을 구분 짓고 대대적으로 동물을 착취하는 시스템과 인간 약자를 차별하는 시스템이 닮아 있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착취하고 억압하는 행위는 타자가 자신과 다르다고 구분 짓는 데서 출발한다. 이 같은 타자화, 대상화의 시스템은 무수한 비인간 동물들 사이의 개별성을 무시하는 “동물”이란 범주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충분히 인간”이지 않은 인간 범주들을 만들어낸다. 그 범주는 연령, 성별, 성적 지향, 인종, 민족, 장애 여부, 교육 수준에 따라 무수히 많다.


  비거니즘으로 확장된 시선은 내가 누리고 있는 특권과 중심성을 마주하게 했다. 인간, 이데올로기적 정상가족, 수도권 거주, 대졸, 비장애, 정규직, 시스젠더-내가 인식하는 나의 젠더-사회에서 패싱 되는 나의 젠더 간의 일치 등. 피부처럼 당연했던,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수많은 범주가 당연하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성이기에, 경제적으로 그리 여유로운 편도 아니었기에, 나의 피해자성만을 인식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나에게도 무수한 특권이, 권력이 있었다. 나에게도 가해자성이 있었다. 이 세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며 비판했지만 막상 내가 가진 권력을 상대화시키기 위한 고민을 한 적은 없었다. 부끄러워졌다.


  느리게 걷는 법을 배웠던 것도, 숨 막히게 바쁠 수 있었던 특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능력주의적 삶의 속도는 그를 가능케 하는 시스템 위에서 작동한다. 나는 그 시스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은, 비장애인의 몸을 표준의 몸으로 여기는 사회 구조와 이 구조를 토대로 구축된 수도권 중심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계획을 향해 정신없이 서둘러 버스와 지하철을 오갔던 것 역시 내가 가진 권력이었다. 우리를 지배하는, 몸과 마음을 소진시키는 이 삶의 속도는 지극히 능력주의적이고, 또 한 편으로는 비장애중심주의적 속도였던 것이다.


  내가 살아왔던 속도를 새로운 언어로 설명해보며,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았다. 아주 다른 삶의 속도를 상상해보았다. 2022년 상반기 기준 서울 시내버스 중 휠체어가 탈 수 있는 저상버스는 47.3% 뿐이다. 서울시 지하철역 277개 중 20개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서울시 장애인 콜택시는 호출 시 평균 대기 시간이 58분이다. 심지어 서울 안에서만 이용할 수 있어서 서울을 벗어난 곳까진 타고 갈 수 없다. 그 마저도 서울에 거주할 때 해당되는 이야기다. 내가 피부처럼 당연히 여기던 삶의 속도를 가능케 했던 시스템은, 어떤 존재에게선 배차 간격 사이의 절묘한 타이밍에 대한 기대를, 계획 다음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박탈하고 있었다.


  무수한 계획 다음의 계획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시위로 빼앗긴 시간에 대해 말했다. 시위에 참석한 이들에게는 자신의 시간을 빼앗고 출근 시간을 늦출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지하철에 휠체어 몇 대가 함께 타서 열차의 출발을 지연시키는 일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은 “잘못된” 시위라고 말했다. 시위 영상과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너무나 다른 속도로 살아온 두 집단의 사람들이 지하철 칸 안에 함께 있었다. 낯선 장면이었다. 30분이 아까운 사람들과 두 시간씩 늦어지는 것도 일상인 사람들 사이에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었다.


  비장애중심주의적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선, 시간이 곧 재산이기에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쓸 겨를이 없다. 차질 없이 계획을 이행하는 일은 곧 능력과 성과로 연결되기에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삶의 속도는 소외된 존재들이 외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계획이 지연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건 아주 예상 밖의 당혹스러운 일일뿐이다. 그러니 재산과도 같은 시간을 뺏는 시위는 “잘못된” 시위라 비난하는 방법밖에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난 20년 간 아무리 애써도 여전히 이동하는 일이 이토록 어렵다면, 어떻게 그 현실을 조용히, 상냥하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특권을 인식하며 부끄러워지는 일에서 멈추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삶의 속도를 변주하는 일이 또 다른 특권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 방법을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로 5호선 지하철이 연착되던 날, 진도를 나가고 남은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시위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는지 아닌지, 시간을 뺏는 일이 정당한지, 도덕적 순치의 개념으로만 따진다면 우린 영영 이해와 공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 삶의 속도엔 더 많은 가능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통받는 이들이 환부를 드러내고 걸어 나왔을 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보고자 내 걸음을 늦출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어수선했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몇몇 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눈빛들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금 여기에도 있다고 다시금 믿어 보기로 했다.


  우리에겐 지금과 다른 삶의 속도가 필요하다. 비거니즘은 그 유일한 답은 아닐지 언정, 분명 하나의 답이다. 비거니즘은 밥상부터 시선까지 내 존재 전체를 흔들어보는 일이고, 전과 다른 방식으로 타자와, 세상과 감응하는 방식을 찾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비건과 비건 앨라이가 더 많아진다면, 그래서 비거니즘이 이동시키는 시선을 따라 삶의 속도를 변주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그리고 언젠가 그것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속도가 된다면. 그래서 세상의 폭력에 다친 이들이 더는 용감해지지 않아도 되는, 용감할 필요가 없어도 되는 날이 온다면.


  그날이 앞당겨지기 바라는 마음을 도시락에 꾹꾹 눌러 담아 본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고민해본다. “나 하나로 세상은 바뀐다”라는 우리 반 급훈이 텅 빈 말이 되지 않기 위해, 바뀔 세상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그 풍경 속엔 타자를 위해 자신의 걸음을 멈추고 기꺼이 무릎을 내어주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라 믿는다. 나도 그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비거니즘이다. 비거니즘을 통해 눈물만이 아니라 땀을 흘리는 일, 무릎 내어주는 일을 부단히 연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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