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집을 알아보고, 계약하고, 대출받는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곧 생길 나의 공간은 비거니즘과 제로웨이스트를 생각하며 채워 넣고 싶었다. 이사를 앞두고서 필요한 물건들을 생각해보았다. 밥솥, 전기포트, 식기, 수세미, 세제, 청소기 등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예산을 정하고 하나씩 리스트에 적었다. 당근마켓으로 검색하여 적당한 가격과 퀄리티의 물건들에 찜하기를 눌러 두었다. 그렇게 이사를 두 달여 앞두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중고로 사 모으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약속을 잡아 중고거래를 하러 가는 것은 상당히 피곤했지만, 굳이 새 물건을 사야 할 이유도 없었다.
쓰지 않는 물건을 팔며 짐을 많이 줄였다고 생각했지만, 하나씩 꺼내 짐을 싸 보니 결코 적지 않았다. 종이책 구매를 줄이겠다며 이북리더기를 사놓고서는 이상하게 책을 더 많이 사모았다. 옷도 여전히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기타 두 대와 콜트 앰프, 써본 지 가물가물한 POD HD 500 이펙터까지 구석에 박아 둔 물건들을 꺼내니 짐이 한가득이었다. 다행히 아빠 차 트렁크에 욱여넣으니 어찌어찌 들어갔다. 그렇게 짐을 꾸려 나와, 생존에 수반되는 과정들을 더 온전히 주물러보고 싶다는, 조금은 이상한 목표를 가지고 이곳에 도착했다.
독립을 시작한 첫 주말, 가장 먼저 한 일은 냉장고 채우기였다. 집에선 엄마가 언제든 쓸 수 있도록 소분해두신 요리재료들이 있었지만 이젠 내가 생존 필수품들을 준비해야 했다. 마트에 가서 대파, 청양고추, 마늘과 잡곡을 샀다. 잡곡을 매번 불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엄마는 흑미, 보리, 현미 등의 잡곡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불려 놓고 얼려두셨다. 얼려둔 잡곡을 꺼내 백미와 섞어 씻고 밥솥에 얹히기만 하면 끝이다. 엄마는 이런 걸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을까. 엄마의 살림력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생각하며 편 마늘, 파, 청양고추를 적당한 크기로 썰었다.
이 집에서는 일회용품을 최대한 쓰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일회용 비닐봉지와 랩은 사지 않았다. 대신 다회용기, 다회용 밀랍 랩을 구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고, 쓰레기가 적게 나오니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빈도도 줄일 수 있었다. 깨끗이 씻어 말린 다회용기에 썰어둔 식재료들을 담아 냉동실에 보관했다. 냉동실에 요리 재료들이 차오르니 그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이 느껴졌다.
네덜란드에서도 요리를 자주 하고 지냈지만, 비거니즘을 시작하고 요리가 훨씬 더 즐거워졌다. 내 몸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직접 만지고 다듬고 있으면 내가 이 땅의 일부임을, 땅과 나의 연결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연결됨 속에서 살아있다는 감각을 확인한다. 채소만으로 요리를 하니 설거지도 쉽다. 물살이와 고기를 다듬으며 물컹한 촉감에 미간을 찌푸릴 일도 없고, 요리하고 버려진 식재료를 보며 사체에서 나오는 박테리아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수채 구멍을 열면 한없이 무해한 파프리카 꼭지, 오이 껍질, 감자 껍질이 켜켜이 쌓여 있다. 손에 한 움큼 쥐어 물기를 꼭 짜 본다. 그 촉감은 맑고 단정하다. 채소 껍질을 아무리 주물러 보아도 나의 손은 여전히 깨끗하다.
독립하고선, 요가와 클라이밍 가는 일을 제외하면 퇴근 후 대부분의 시간을 살림에 쓴다. 한 명의 사람을 먹여 살리는 일에 정말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매번 몸으로 느낀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걸레를 빨아 널고, 세면대와 화장실 바닥을 닦고, 변기를 닦고, 신발장을 치우고, 빨래를 널고, 마르면 접고. 도시락을 씻고, 밥을 차려 먹으면 또 설거지를 한다. 반짝이던 방바닥도 며칠 뒤면 먼지가 뒹군다. 끊임없는 반복이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살림은 소홀할 수 없다. 살림은 나를 돌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먹이고 쉬이며 얻은 힘으로 나는 또다시 살림을 한다.
밴드 “양반들”의 보컬이자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동물권 운동가이자 예술가인 전범선은 비거니즘을 “살림”이라 번역한다. 그는 비거니즘 계간지 <물결> 2022년 봄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비거니즘을 ‘살림’이라고 번역한다. ‘완전채식주의’가 아니다. 먹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동물을 죽이지 않는 게 중요하다. 비거니즘은 탈육식이기 이전에 죽임 반대다. 다시 말해 살림이다. 살리는 철학이자 살리는 운동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느끼는 모든 존재를 ‘세이브’하고 ‘케어’함이다.
(...) 만물이 하나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상호 관계 속에 상생한다. 집안 살림이 원위치가 전부이듯, 지구 살림 역시 순환이 전부다. 어떻게 하면 인류가 책임 있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지구의 유한한 자원을 빌려 쓰고 돌려줄 것인지를 고민한다. 에콜로지의 화두인 지속 가능성은 살림꾼의 염원이다. (...) 녹색, 생태주의 담론은 곧 지구 살림이기 때문에 언제나 비거니즘으로 통한다.”
비건이 된 후 살림이 빠진 내 생활에서 공허함을 느꼈던 것은, 말 그대로 비거니즘이 살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난 동물과 지구를 살리는 일엔 관심을 두었지만, 정작 나 자신을, 내가 생활하는 공간은 살리고 있지 않았다. 퇴근하고 편히 쉴 수만은 없지만, 나는 살림꾼이 된 지금, 몸과 마음이 더욱 건강하다. 어질러진 물건들을 원위치에 돌려놓고, 내가 머무는 이 공간만큼은 지구에 무해하길 바라며 무한히 반복되는 설거지를 한다. 내가 가진 자원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며 걸레를 적셔 집안 곳곳을 닦고, 걸레를 빨아 또 쓸 수 있는 다음을 기약한다. 나를 둘러싼 이 물건들에 “다음”이 있다는 데서 풍요로움을 느낀다.
존재를 먹이고 살려내는 일은 귀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넌 해낼 수 있어”라고 외치는 성과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살림할 시간과 힘을 앗아간다. 생산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인정받는 능력과 그렇지 않은 능력, 효율적인 것과 비효율적인 것을 구분 짓고 후자는 배척한다. 성과주의의 규율에선 반찬통의 구석까지 잘 씻고, 물러진 비누를 스타킹에 넣어 끝까지 써보고, 행주를 뽀얗게 빨아내는 일은 능력이라 인정받지 못하고 효율적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성과주의의 규율에 따라 인정받고, 성취하느라 바쁘고 고달픈 현대인은 살림을 자본과 타자의 노동에 외주화 한 채 살아간다. 퇴근하고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는 살림을 할 수 없다. 한껏 지친 채 배달음식으로 끼니와 설거지를 한 번에 해결할 수밖에 없다.
바라건대 이 글을 읽고 스스로가 게으르다고 자책하지 않길 바란다. 모두가 일정한 퇴근 시간을 보장받고, 개인의 공간을 가질 수는 없다. 모두가 살림을 할 수 있는 신체를 지닌 것도 아니다. 또한 살리고 돌보는 일에 시간과 힘을 많이 쏟을 수 없는 것은 개인이 충분히 부지런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 능력에 무게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독립을 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고, 매 끼 요리해서 먹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조금이나마 여건이 허락하는 때가 생긴다면, 잠시 멈추어 다른 일에 시간과 힘을 쏟아보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나의 몸과 그 몸이 머무는 공간을 조금 더 내밀하게 감각하고 살려내는 일 말이다.
살림 없는 삶을 사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 살을, 내가 머무는 공간을 만지고 느낄까? 하나의 감각을 완전히 닫아버린 채 우리는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고, 폐기하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 재생과 순환은 부재한다. 살림의 감각 곳곳이 깨어날 때, 살림하며 나의 존재와 공간을 더욱 온전히 자각할 때, 지구 역시 그렇게 살림해야 하는 터전이라는 생각 역시 스멀스멀 찾아올지 모른다. 나를 먹이는 음식들을 내 손으로 만지며, 이 음식들은 어디서부터 오는지 궁금해하는 마음이 불현듯 피어날지 모른다.
영혼과 육신을 돌보는 살림, 그 회복의 시간을 삶에 들여오는 살림꾼이 많아지길 바라본다. 끊임없는 성장보다는 순환을, 경쟁보다는 살림을 위해 시간과 힘을 쏟아도 괜찮은, 뒤쳐질까 불안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