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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욘 Oct 18. 2021

업데이트해주세요.

새로워진 김수연 Ver. 31.8.0을 만나보세요!

요즈음의 나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오랫동안 업데이트하지 않은 구형 스마트폰 같다. 용량도 꽉 차고 배터리 성능도 떨어질 대로 떨어진, 무리하게 업데이트를 하다가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만 같은 그런 구형 스마트폰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나를 굴러가게 하는 운영체제는 아직 몇 년 전에 멈춰있는 듯하다.


어렸을 땐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너무나 많고 더 빨리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매일 새로운 것을 흡수하며 OS를 업데이트 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것도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이라 전혀 기대되지 않는다. 책을 읽어도 지난번에 읽은 그 책 같고, 유튜브를 봐도 아까 본 그 영상 같다. 드라마도, 뉴스도 안 본 지 오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어떤 것도 흥미롭지 않다. 갑자기 혼자 이세계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 어떤 이벤트도 재밌지 않을 것 같다.


업데이트 주기는 점점 길어지고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업데이트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어느 순간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세상 돌아가는 것 좀 알아야지'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받아들이려 하면 업데이트하는 데에만 몇 날 며칠이 걸린다. 도중에 견디지 못하고 멈춰버리기도, 다시 익숙한 버전으로 돌아가기도 다반사이다. 나이는 들어가지만 나는 그렇게 줄곧 과거에 머물러 있다.


백신 2차 접종을 하러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예약한 병원이 소아과였기에 진료 보러 온 애기들과 백신 접종하러 온 어른들이 한데 섞여있었다. 대기실에 앉아 진료실에서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저렇게 자지러지게 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곱씹어보고 있었다. 대기실 구석에 놓인 신장체중 측정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들면 키도 줄어든다는 말이 떠올라 오랜만에 한번 재보기로 했다.


측정기에는 이 전에 측정했던 아이의 키와 몸무게가 표시되어 있었다. 98cm에 14.5kg. 이 아이는 앞으로 얼마나 더 자라게 될까 상상했다. '설마 진짜로 줄어든 건 아니겠지'라고 마음 졸이며 겉옷을 벗고 측정기에 올라갔다. 키 재는 기계가 위잉하고 내려올 때면 괜히 두근거린다.


측정기에서 내려와 결과를 확인해보니, 줄어들긴커녕 오히려 자라 있었다. 그것도 무려 1.4cm나. 잘못 잰 건가 싶어서 다시 한번 재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성장판 녀석, 아직 닫히지 않았던 것이냐. 어리둥절한 와중에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만 오면 세상 떠나가라 울어재끼는 아이들을 대하면서도 밝은 미소를 유지하는 의사 선생님이 계셨다. 두 번째 뵙는 선생님에게 '선생님. 저 서른 한 살인데 아직도 키가 자라네요. 껄껄껄' 하고 너스레를 떨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따끔한 주사 때문에 그만 잊어버렸다.


나라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새로워질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비관적인 주인의 생각과 달리 몸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몰라봐서 미안하다 몸아, 옆으로만 불어나는 줄 알았는데 위로도 늘어나고 있었구나. 자라난 1.4cm만큼, 나는 앞으로도 계속 성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괜시리 들떠 버렸다. 오늘만큼은 새 몸에 걸맞게 미뤄왔던 업데이트를 해야겠다.


새로워진 김수연 Ver. 31.8.0을 만나보세요!



31살에 키 자랐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는 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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