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 센터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버스에서 내리고 버스를 타는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곧 도착하는 버스 번호를 알리는 전광판만 멍하니 바라보며 서있었다. 면접장까지 가는 버스는 오려면 10분이나 남았다. 하필 출근 시간과 겹쳐 만원이었던 지하철을 타고 오느라 기운이 빠질 대로 빠졌지만 앉아서 기다릴 수도 없었다. 백화점 행사장에서 산 검정 정장 세트가 몸에 딱 맞아서, 밥을 조금이라도 많이 먹으면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딱 맞아서 앉아있는 것보단 서있는 게 편했다. 지나치게 딱 맞는 옷을 입으니 서있기만 해도 몸이 긴장됐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백화점 가자. 그래도 면접볼 때는 좋은 거 하나 있어야지. 엄마가 사줄게."
단둘이 하는 외출이 오랜만이어서였는지 엄마는 조금 들떠 보였다. 백화점 1층 조명은 유난히 밝아서 들어서는 순간 다른 세계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향수 시향지를 나눠주는 키가 크고 예쁜 남자를 지나 위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타이밍 맞춰 올라섰다. 발 딛고 선 계단이 금세 2층에 도착했다.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는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길게 줄이 늘어섰다. 쳐다본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쳐다봐서도 안될 것 같아 재빨리 몸을 돌렸다. 3층에 도착하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매장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세탁된 밤색 유니폼을 입은 중년의 여성 직원에게 면접용으로 입을 기본 정장이 있냐 물었다. 직원은 곧바로 검정 재킷, 흰 블라우스, 검정 치마를 내왔다. 원단을 만져보는 척 달려있는 가격표를 확인했다. 눈알을 굴리며 소리 없이 셈을 해보니 전부 다 하면 100만 원이 훌쩍 넘었다. 엄마가 말한 좋은 것이 100만 원짜리는 아니었을 텐데.
"면접 때만 잠깐 입을 건데 좀 비싸지 않아?"
엄마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한번 입어보시겠어요? 핏은 몸에 맞춰서 수선해 드려요."
밤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한 바퀴 둘러보고 오겠다며 도망치듯 매장을 나왔다. 직원은 익숙한 듯 둘러보고 오라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조금 더 캐주얼한 여성복 매장이 몰려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블라우스와 치마가 잔뜩 걸린 매장에 들어가 처음인 것처럼 물었다.
"면접용으로 입을 만한 기본 정장 있나요?"
하늘하늘한 연분홍색 블라우스와 몸에 잘 맞는 베이지색 슬랙스를 입은 내 또래의 여성 직원이 이번에도 검정 재킷, 흰 블라우스, 검정 치마를 내왔다. 역시나 원단을 만져보는 척 가격부터 확인했다. 이번에는 전부 다 해서 59만 원이었다.
"다른데 한번 더 보고 올까? 아님 입어나 볼래?"
엄마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서 눈치가 보일 때 꼭 맘에도 없는 말을 덧붙였다. 한 층씩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의류 매장 중에서는 제일 높은 8층까지 올라왔다. 여기는 너무 캐주얼한 것 밖에 없다고 말하는 순간 철 지난 제품을 모아 놓은 행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올라온 김에 저기도 한번 보고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60% 세일이래"
60% 세일이라고 크게 적힌 문구 아래 작게 ‘최대’라고 적혀있었다.
"최대 60% 라는 거지 모든 제품이 60% 할인된다는 뜻은 아니야."
"알았으니까 한번 보기나 하자."
층별 안내도에는 ‘8층 영캐주얼’이라 쓰여있었지만 행사장에는 비즈니스룩 브랜드도 있었다. 이번에도 면접용으로 입을만한 기본 정장이 있냐 물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검정 재킷, 흰 블라우스, 검정 치마가 등장했다.
"이렇게 세트로 15만 9천 원이에요. 원래 다 해서 39만 9천 원인데 오늘까지만 이 가격이니까 살 수 있을 때 사세요."라고 검은색 카라티에 청바지를 입은 중년의 여성 직원이 말했다. "몇 프로 된 거예요?" 엄마가 물었다. 계산기를 두드리던 직원이 60% 할인된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나는 원단을 만지작거리며 이 정도면 원래부터 15만 9천 원짜리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가를 높게 측정하고 세일 많이 한 것처럼 보이게 해서 혹하게 하는 거 꽤 흔한 전략이잖아.
"사이즈는 어떻게 되세요? 55? 66?"
직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66 입어볼게요."
판자로 대충 만들어놓은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블라우스와 재킷은 괜찮았지만 치마가 문제였다. 엉덩이를 구겨 넣고 힘껏 숨을 참으니 간신히 지퍼를 올릴 순 있었지만 박음질이 금방이라도 뜯어질 것만 같았다.
"미디엄, 라지도 아니고 66 사이즈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유구히 내려오는 한국의 사이즈 시스템에 대해 괜스레 구시렁대며 거울에 이리저리 몸을 비춰보았다. 정장이 낯설어서인가 아니면 너무 딱 맞아서인가 남의 옷을 억지로 뺏어 입은 사람 같았다.
"잘 맞네. 딱 손님 거다."
엄마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직원이 넉살 좋게 말했다.
"혹시 치마 하나 더 큰 것도 있나요?"
"더 큰 거는 주문해야 돼요. 그리고 여기 있는 것들만 세일 들어가는 거라 주문하면 아마 세일 안 들어갈 거예요."
어떻게 된 게 사이즈도 제대로 준비가 안되어있냐며 이번에는 엄마가 구시렁거렸다.
"아까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렇지. 괜찮을 것 같아."
터질 것 같은 치마를 붙잡고 궁색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럼 이걸로 할래? 아님 아까 봤던데 다시 가서 입어볼까?"
엄마는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덧붙였다.
"그냥 이걸로 하자."
60% 세일해서 15만 9천 원인 66 사이즈 검정 정장 세트를 엄마는 3개월 무이자 할부로 결제했다. 결제하면서도 계속 요즘 옷은 왜 사이즈가 다양하게 안 나오냐면서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제일 많이 입을 만한 사이즈를 많이 만드는 게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하잖아. 규모의 경제 알지? 뭐 그런 거야."
엄마가 규모의 경제란 말을 아는지는 모르겠다. 엄마 말이 듣기 싫을 때마다 나는 엄마가 잘 모를 법한 단어를 골라 거들먹거렸다. 직원은 딱 맞는 걸로 잘 샀다며 웃으며 쇼핑백을 건네줬다. 몸에는 잘 안 맞아요. 우리 지갑 사정에 잘 맞는 거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쇼핑백을 끌어안고 엄마와 나란히 앉았다.
"이것도 좋은 거야. 원래 40만 원이래잖아."
꺼내지도 않았던 속마음을 들었는지 엄마가 조심스레 말했다.
"맞아, 어차피 기본 정장이라 별 차이 없지, 뭐."
동의의 뜻을 전했다.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그치 엄마, 아무래도 100만 원짜리랑 15만 9천 원짜리는 달라 보이지? 아까 잠깐 만져보기만 했는데 100만 원짜리는 원단부터 다르더라. 아마 착용감도 훨씬 좋을걸? 그래도 내가 기성사이즈에서 아주 살짝 벗어나 있어서, 15만 9천 원에 규모의 경제를 누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잠시 숨을 참고 밥을 조금 덜 먹으면 될 정도로만 벗어나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대중에 편승할 수 있으니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우리 오늘 운 엄청 좋았네. 오늘만 세일이었대잖아. 완전 돈 번 거다."
너스레를 떨어대도 엄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기다리던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왔다. 스프레이로 잔뜩 올려 넘긴 머리가 땀에 흘러내리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뒤뚱뒤뚱 버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치마도 슬금슬금 올라갔다. 숨을 멈추고 명치까지 올라간 치마를 다시 끌어내렸다. 밥 조금만 덜 먹으면 입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돈 벌면 옷부터 새로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