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던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밑줄까지 쳐가며 책을 읽는 모습이 꽤나 진지해 보였다. 곁눈질로 훔쳐본 책 제목은 ‘사랑의 기술’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연애를 하려고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나 싶어 조금 웃겼다.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서 나도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봤다. 제목만 보고 기껏해야 가벼운 연애 지침 정도를 나열한 책인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당시의 내가 이해하기엔 꽤나 어려운 내용의 책이었다.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금방 반납해버렸다. 몇 번의 연애를 거치고 얼마 전 그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스물두 살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혹은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이 작은 책은 사랑은 기술이라고 하는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랑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의 발견이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배우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기술, 예컨대 음악이나 그림이나 건축, 또는 의학이나 공학의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쳐야 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올해 이별을 했다. 인생에서 가장 오래 만난 사람과. 오랜 연애를 하면서 깨달은 건 나는 사랑을 어떻게 하는 줄도, 어떻게 받는 줄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다음에 만나게 될 새로운 사람과는 기필코 사랑을 하겠다고, 사랑을 주겠다고 다짐했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나는 늘 바다 같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싶었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나를 반겨주는 사람,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넓고 깊은 사람, 가끔은 거칠어 보여도 그 깊은 마음속에 다양한 세상을 품고 있는 사람을 원했다. 그러나 넓고 깊은 바다에 몸을 내던지기에 나는 너무 겁이 많았다. 언제나 적당히 발이 닿는 곳까지만 몸을 담갔다 빠져나오기만 반복했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는 시구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였다.
수영을 배우고 있다. 지난 32년간 나는 수영을 못 한다고 믿었는데, 못하는 게 아니라 배울 생각이 없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막상 배우고 나니 그동안 왜 안 했었는지 아쉬울 정도였다. 사랑도 기술이라면 어쩌면 나는 사랑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배울 마음조차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수영처럼 배우고 익히면 나도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빠져 죽지 않고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지 않을까.
몇 번의 실패에도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두려움 없이 뛰어들고,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게. 잠겨 죽어도 좋다고 여길 만큼 나를 내던지게 될지 모를 테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 역시 바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숨을 참고 깊이 내려가면 비싼 전복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런 바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