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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욘 Jun 05. 2020

우연한 여행

멀쩡히 잘 다니던, 혹은 잘 다니는 것처럼 보이던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 여행을 갔다. 이제는 식상해진 퇴사 여행이었다. 여행을 가려고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었지만 그만둔 김에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다녀왔다. 50여 일의 이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치 못했던 일들로 가득했었다. 계획해봤자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것, 남들이 좋다고 한 것들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라는 것도 새삼 새롭게 배웠다.


한때는 여행을 하면서 자아를 성찰하고 몰랐던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특이한 곳을 가보거나 생사를 넘나드는 대단한 모험을 하며 엄청난 깨달음을 얻고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했었다. 그러나 짧고 긴 몇 번의 여행을 통해 내가 깨달은 건 엄청난 경험, 자아실현 같은 건 고작 며칠의 여행을 통해 이룰 수도 없고 나는 이룰 마음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남들 가지 않는 곳? 안 가는 덴 이유가 있다.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 안전이 제일이다. 20여 년간 와식생활을 즐기던 사람이 여행을 간다고 갑자기 180도로 달라져 죽음을 감수하는 모험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그래도 여행을 통해 자아실현은 아니지만, 내게 맞는 여행 스타일 정도는 확실하게 알았다. 크고 화려한 도시보다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바다 마을을 좋아하고, 빡빡한 일정의 투어보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근처 여행지 한 군데 정도 가볍게 돌아본 뒤에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디저트도 먹으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한마디로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 먹고 유유자적하는 게 최고다.


이 여행에서 나는 바르셀로나를 가장 기대했었다. 그 유명한 가우디 투어도 한 달 전부터 예약해두고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 스케이트보드도 타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바르셀로나는 기대했던 것만큼 좋지 않았다. 사람들도 너무 많고, 도시도 예쁘긴 하지만 뭔가 계속 있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고 해야 할까. 다들 너무너무 좋다고 추천해줬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별로 볼 것 없으니 오래 있을 필요 없다고 했던 수도 마드리드나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가 훨씬 좋았다. 기대했던 바르셀로나에 실망해서 그런지 여행이고 나발이고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그래도 왔으니 야경은 한번 봐야지 싶어서 야경으로 유명하다는 ‘벙커’에 갔다. 도착하니 이미 많은 여행객들인지, 현지인들인지 삼삼오오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시끌벅쩍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 사이를 뻘쭘하게 비집고 들어가 사람이 없는 외벽 같은 곳에 올라가 앉았다. 같은 공간이지만 저 떠드는 무리의 사람들과 단절되어 다른 세상에 있는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Bunker in Barcelona, Spain @neoyusmik

조용히 해가 지길 기다리는데 옆에 있는 줄도 몰랐던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구글 지도를 봐야 하는데 배터리가 없다며 보조배터리 좀 잠시 빌려줄 수 있냐고. 나처럼 혼자 온 듯한 그 사람에게 어쩐지 동질감을 느껴 흔쾌히 보조배터리를 빌려주었다. 그리고 충전하는 동안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보다 한 살 많았던 그 사람은 내가 졸업한 학교의 바로 옆동네 학교를 졸업하고 나와 같은 시기에 한 회사에 공채로 입사했다고 했다. 학교와 취업 얘기로 한참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내가 꽤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도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혼자 하는 여행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Arc de Triomf in Barcelona, Spain @neoyusmik

돌이켜보면 전부 그런 식이었다. 유명한 바르셀로네타 해변보다 보드 렌탈샵 주인아저씨가 알려준 개선문 앞 광장이 보드 스팟으로 더 좋았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달리 미술관이 여행 통틀어서 가장 좋았고, 사람들이 맛있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간 유명 맛집보다 걷다가 우연히 들른 이름도 모르는 작은 식당 음식이 훨씬 맛있었다. 우연히 옆에 앉은 생면부지의 사람과 나눈 대화가 몇 달 전부터 예약하고 봤던 공연보다 즐거웠다. 남들 가는 대로 쫓아가려고 하나하나 계획하고, 계획대로 안되면 좌절하는 대신 발이 이끄는 대로 걷다가 만나는 모든 우연을 기꺼이 즐겼다. 즐거웠다. 앞으로 남은 여행에서 어떤 우연을 마주칠까 설레기도 했다.


흔히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여행할 때처럼 지금, 여기에서 마주치는 우연과 인연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내 삶도 여행처럼 즐거워질 수 있을까.

Park Güell Water Color Painting @neoyusm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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