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냉장고를 연다. 텅 비었다. 집에 음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건 어제 시켜 먹고 남은 치킨 두 조각이 전부다. 눈곱만 겨우 떼고 늘어난 티셔츠와 수면바지를 입은 채 슬리퍼 질질 끌며 집 앞 편의점으로 향한다.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을 만한 게 있나 둘러보지만 딱히 끌리는 것은 없다. 삼각김밥은 밥에 비해 내용물이 너무 적어 감질맛 나서 싫고, 샌드위치도 뒤에는 빵만 있어서 싫다. 도시락은 그냥 별로. 한참을 편의점 안을 배회하다 늘 먹던 마늘 후랑크 소시지를 집어 든다. 목이 마를 수도 있으니 2+1 행사하는 음료수도 챙긴다. 포인트 적립하냐고 묻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대답도 없이 고개만 젓는다. 올 때마다 다음엔 포인트 카드 만들어서 적립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귀찮아서 매번 그다음으로 미룬다. 적립 못한 포인트로 오늘 산 소시지랑 음료수 정도는 가뿐히 살 수 있었을 텐데.
편의점에서 야무지게 데운 소시지를 먹으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가 와있다. 엄마는 방금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온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네. 엄마는 꼬질한 몰골로 소시지를 입에 물고 들어오는 딸을 한번 쓱 쳐다보고 인사도 없이 잔소리부터 퍼붓는다.
“아이고, 냉장고에 어쩜 든 게 하나도 없냐. 그리고 너는 왜 밥은 안 먹고 뭐 그런 걸 먹고 있니?”
"언제 왔어?"
무뚝뚝한 딸의 인사를 무시하고 엄마는 다시 냉장고 검사를 한다.
“이건 또 왜 안 먹고 그대로 있어?”
한 달 전에 엄마가 채워놓고 간 식량 중 하나이다.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이상하게 내가 볼 땐 없었던 것들이 엄마가 볼 때면 하루 종일 엄마가 집에 오기만 기다리던 우리 집 강아지 푸딩이처럼 바로 튀어나온다. 냉장고 검사를 마친 엄마는 이제 집안 곳곳을 둘러본다.
“집안 꼴이 아주 돼지우리여. 어휴. 이 먼지 봐, 먼지. 화분에 물도 좀 주지 이게 뭐냐? 다 죽었네. 분리수거는 또 왜 안 했어? 빨래는 했니? 여름 이불 꺼내지. 이 이불 덥지도 않니?”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한 달 동안 축적된 잔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정신이 혼미하다. 집안 검사도 끝낸 엄마는 능숙한 손길로 빨래와 청소를 한다. 청소도, 빨래도, 분리수거도, 화분 물 주기도, 내 나름 한다고 한 건데 엄마 눈엔 턱없이 부족한가 보다. 이번엔 대형마트로 가서 한 달치 장을 본다. 짐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보기에 그다지 큰 도움이 안 되는 나도 동행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난다. 집 근처 돼지갈빗집에서 함께 돼지갈비를 먹고 후식으로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돌아오는 길에 있는 옷가게를 지날 때 나는 마네킹에 걸린 치마가 예쁘지 않냐며 미끼를 던진다. 엄마는 한번 입어보라며 미끼를 문다. 마네킹과 달리 타이트한 복부 핏에 '아, 아까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라며 구차한 핑계를 댄다. 그렇지만 누가 봐도 그냥 살이 쪄서 타이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쁘네."
엄마의 고슴도치 필터는 30년이 지나도 벗겨지지 않는다. 엄마도 블라우스 하나를 집어 든다.
"예쁘네, 엄마도 사."
엄마가 블라우스와 함께 내 치마도 계산해준다. 개이득.
다음날 엄마는 가기 전에 신신당부를 한다.
“냉장고에 고기 있으니까 구워 먹고, 바로 안 먹을 거면 냉동실에 넣어놔. 밥은 얼려놨으니까 해동해서 먹고. 미역국도 끓여서 냉장고에 넣어놨으니까 꺼내서 데워 먹어.”
엄마는 서른 살 먹은 딸이 밥도 못 먹고 다닐까 봐 아직도 그리 걱정을 한다. 한 번씩 집에 오면 음식을 한 가득 쟁여놓고, 챙겨 먹으라는 말을 백번도 더 하고 간다. 그리고 빠뜨리는 일 없이 꼭 미역국을 한 냄비 끓여놓고 간다. 소고기를 잔뜩 때려 넣은 미역국. 다른 국도 아닌 꼭 미역국인 이유는 엄마의 지론에 의하면 자고로 한국인의 밥상에는 국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유일하게 먹는 국이 미역국이기 때문이다. 안 해놔도 된다는 내 말은 들리지 않는가 보다. 지난달에 끓여놓고 간 미역국은 3주 동안 안 먹어서 다 쉬어버렸단 얘기는 하지 못했다.
가끔씩 엄마 집에 갈 때도 어김없이 미역국이 상에 올라온다. 그리고선 한 시간마다 한 번씩 배 고프지 않냐면서 먹을 걸 준다. 사육당하는 기분도 들지만 그 기분이 싫지 않다. 이미 많이 먹어서 배부르다는 말 역시 엄마 귀에는 박히지 않고 튕겨나간다. 가끔 엄마는 대체 무슨 마음일까 궁금하다. 먹는 모습이 귀여운 우리 집 강아지 푸딩이한테 내가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을 주는 거랑 비슷한 건가. 귀여워 보일 나이는 진즉에 지나 이제 징그러울 것 같은데. 자식을 낳아 길러보면 알 수 있으려나. 아직은 모르겠다. 이번에 해놓고 간 미역국은 꼭 다 먹고 맛있었다고 말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