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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욘 May 31. 2020

어둡고 축축한 건 내 마음이었다.

지극히 사적인 기생충 감상문

남들 다 볼 때는 절대 안 본다고 버티다가 뒤늦게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드는 감상은 찝찝함이었다. 여러 똑똑한 사람들의 해석을 찾아봐도 이유를 몰랐다.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것인가?' 며칠이나 그렇게 찝찝하게 지내다 몇 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절여진 내가 기우의 수석처럼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아무도 꺼내 볼 수 없게 마음 깊이 묻어두고 나조차 잊고 있었는데 말이지.


내가 초등학생 때 우리 가족은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살았다. 부모님은 자식들이 원하는 것은 웬만하면 들어주는 편이었고 집에는 언제나 장난감이 넘쳤다. 최신 컴퓨터와 일제 게임기도 있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위인전은 세트로 구비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길어서 피아노 치기 좋을 거라는 말에 넘어가 피아노 개인 과외를 붙여주시거나, 특별활동으로 선택한 ‘클래식 기타’ 반에서 쓸 고급 기타를 사주시기도 했다. 음악 시간 준비물로 가져갈 리코더는 문방구에서 파는 대량생산된 조립형 플라스틱 대신 독일에서 수입한 고급 리코더로 준비해주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우리 가족은 오래된 빌라로 이사를 갔다. 주부였던 엄마는 일을 나가시기 시작했고, 자주 한숨을 쉬었다. 어른들의 일이라 자세히는 몰랐지만, 우리 집 사정이 전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중학교 입학 즈음, 공무원이셨던 아빠 덕에 우리는 공무원 임대 아파트에서 살 수 있게 됐다. 이제는 재개발이 되어 사라진 그 아파트는 공교롭게도 강남에 있었고 나는 흔히 말하는 8학군에 입성했다. 전에 살던 집보다 딱 반 정도였던 그 집은 부엌에 식탁 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아서 우리는 방보다도 작은 거실에 작은 상을 펴고 밥을 먹었다. 나는 TV를 보며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사춘기였던 아들, 딸에게 방 하나씩 주고 나니 부모님들은 그 작은 거실에서 생활했다. 어차피 잠만 자는 거라 상관없다며. 철없던 중학생은 가장 넓은 방을 차지하고도 고마움을 몰랐다. 임대 기간이 끝나고 또 한 번의 이사 후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강남의 어느 빌라 반지하 집으로 이사를 갔다. 강남을 벗어났으면 그래도 땅 위에 있는 집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계속 강남에 살았다.


그 집에서 나는 20대의 절반을 살았다.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의 집보다는 훨씬 좋은 집이었다. 반지하라 해가 잘 들지 않고 매일 습한 건 어쩔수 없었지만 방도 많고, 넓고, 근처에 양재천도 있어서 좋았다. 강남구 oo 동 oo 빌리지 oo 동 02호. 우리 집은 B02호였지만 집 주소를 써야 할 때면 나는 항상 지하를 뜻하는 B를 제외하고 호수를 적었다. 아무도 내가 지하에서 사는 줄 모르길 바랐다. 강남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의 라이프스타일은 나의 삶과는 너무나 달랐다. 때마다 해외여행에 어학연수에 유학으로 한국을 떠나는 그녀들이 부러웠다. 밝고 쾌적한 그녀들의 집이 부러웠다. 일 할 필요가 없는 친구네 엄마가 식당 일 나가는 우리 엄마를 보고 부럽다고 말할 때 화가 났다. 화가 났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부러우면 아줌마도 식당 나가서 12시간 씩 일하시던가요.'라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지는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녀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대학에서 누군가 나보고 강남 산다고 너네 집 잘 사냐고 떠들어댈 때도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뒀다. 한 번도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온 적이 없었다.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가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것도 전부 거절했다.


스물 한 살 때, 학교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당선되어 여름 방학 한 달간 미국 플로리다로 해외연수를 가게 되었다. 언제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그곳은 마치 천국 같았다. 넓은 부엌과 거실이 있고, 창문을 열면 수영장이 보이는, 웬만한 아파트보다 넓고 쾌적한 기숙사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나는 한 번도 강남의 반지하를, 그곳에 있는 가족들을 떠올리지 않았다. 볕이 잘 드는 이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 생각했다. 일장춘몽 같던 한 달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그 집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 생각했다. 점점 우울해졌다. 집 때문에 우울했는지 원래 우울했는데 집 탓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기 상으로는 그렇다. 그와 동시에, 피부는 울긋불긋한 트러블로 가득 찼다. 아빠는 언젠가 거나하게 취해서는 햇빛도 안 들고 곰팡이 피는 이런 집으로 이사 온 당신 탓에 내 피부가 망가졌다며 미안해하셨다.

떠나고 싶었다. 이번에는 학교에서 운영하는 단기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비용은 350만 원이었다. 나는 맡겨놓은 것 마냥 돈을 요구했고 엄마는 언젠가 한 번은 남들처럼 어학연수 보내주고 싶었다며 모아놓은 돈을 주셨다. 무슨 마음으로 주셨는지는 서른이 된 지금도 나는 모르겠다. 당신은 맨날 같은 옷만 입으면서 내 옷은 철마다 백화점에서 사주시는 마음이겠지. 엄마가 매일 12시간씩 요리하고 설거지하며 모은 돈을, 거칠어진 손으로 내미는 그 돈을 나는 당연하게 받았다. 5주간의 연수가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달라진 건 없었다. 영어 실력은 하나도 늘지 않았고, 우리 집은 여전히 어둡고 축축했다.

다음 학기는 휴학을 했다. 피부는 점점 나빠졌다. 사람들이 트러블 가득한 피부를 보고 수군대는 것만 같아 밖에 나가면 늘 땅만 보고 걸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누구든 눈을 마주치면 자격지심이 가득한 내 마음도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어두운 방 안에 누워서 현실을 도피했다. 뜨거운 태양과 바다, 모험을 떠나는 내 모습을 그리며 공상만 했다.


착실히 경험을 쌓고 나아가는 동기들과 선배들이 부러웠다. 그런 경험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 나 빼고 운이 좋았던 것이면서 지들이 잘난 줄 안다며 남몰래 속으로 욕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해 볼 생각 같은 건 애초에 보기에 없었다. 용기가 없어서 도전도 안 했으면서 여우의 신 포도처럼 합리화하기 바빴다. 병든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드러났을 것이다. 말수는 점점 적어지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버렸다.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에 그 집에서 나는 어찌어찌 대학을 졸업했고, 어찌어찌 운 좋게도 들으면 알 정도는 되는 회사에 들어갔다. 근면성실하신 부모님은 서울 변두리 조용한 동네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셨고 그 해 가을에 아빠는 정년퇴직을 하셨다. 두 자식 모두 제 밥벌이를 하니 한시름 걱정을 놓을 수 있을 거라는 부모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는 미처 갚지 못한 학자금 대출 천만원을 안고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사 후에는 염원하던 유럽 여행도 다녀왔다. 막상 다녀오니 별거 없었지만. 그리고 다음 회사에 들어갈 때까지 오랜 시간 집에 있었다.

17층인 지금 집은 볕이 잘 든다. 거실의 넓은 창으로 바로 앞에 있는 산도 아무 방해물 없이 정면으로 볼 수 있다. 칠흑 같은 어둠과 어슴푸레한 새벽, 맑은 아침과 화창한 오후를 느낄 수 있다. 산은 때마다 옷을 갈아입고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며 살아있다는 게 무엇인지 알려준다.


반지하 집은 항상 어수선했었고 병든 마음처럼 정신없었다. 이사 오면서 꽤 많은 짐을 버리고 왔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들이 쌓여있었다. 집에 있으면서 나는 자주 짐을 정리했다.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매우 어려웠지만 지저분하게 쌓여있는 짐들이 내 마음 같아서 강박적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스스로 비정상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 몇 년간 미루던 피부과 치료도 받았다. 상담

도 한번 가봤다. 설문조사 같은 검사지 몇 개를 작성했다. 상담자는 검사 결과를 보고서는 감정이 좀 예민한 것뿐이지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회사 다닐 때 자살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는 말에 상담자는 갑자기 키보드를 두들겼다. 몇 분의 상담 끝에 당시에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랬던 것이니 또 그런 생각이 들면 다시 오라 했다. 그 뒤로는 가지 않았다. 좋아하는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볕이 잘 드는 집으로 이사 오고 내 마음도 어느 정도 양지로 올라왔을 때 나는 미안함을 느꼈다. 그동안 남 탓하고 부모님 탓하고 세상 탓한 것이 미안했다. 자책하며 스스로를 탓해서 나한테 미안했다. 그러나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신 나는 이 죄책감을 다시 깊이 묻어버렸다. 마치 그런 일은 내 인생에서 없었던 것처럼. 나는 언제나 평온하고 문제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그런데 망할 놈의 영화가 다시 끄집어 냈다. 곰팡이 냄새가 난다는 반지하, 그곳에서 벗어나려 아등바등하는 모습, 상류층에 느끼는 열등감, 자격지심, 무력감이 나의 못난 예전을 상기시켰다.


이제는 정말 사과해야 할 때인 것 같아 이 글을 쓴다.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하고 비교해서 미안합니다. 부모님 탓해서 죄송합니다. 할 수 있는 한 해주고 싶어하셨다는 걸 몰라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삐뚤어진 사람으로 자라서 죄송합니다. 세상 탓해서 미안합니다. 자책해서 미안합니다. 이런 못난 피해의식 덩어리도 자식이라고, 친구라고 옆에 끼고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탓하지 않고 책임지며 행동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눈 내린 산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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