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너와 내가 만드는 우리라는 하나
자연에서 다른 동물들과 경쟁할 수 있는 강한 근육, 빠른 달리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없었던 고대사회 인류에게 무리에서의 이탈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견해를 토대로 진화생물학과 인류학의 주류는 “사람은 왜 함께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인간 공동체의 기원을 알 수 없는 미래가 주는 공포를 극복하고자 하는 생존 욕망에서 찾습니다. 생존을 위해 집단을 구성한 대표적 현상이 바로 국가입니다.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인간은 지성의 한계를 느끼고, 예기치 못한 피해를 최대한 방지하고자 더 큰 집단, 바로 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릅니다. 물리적인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내부의 소수 집단에게 공동체를 이끌 권력을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구성된 국가는 개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유의 일부를 대가로 지불한 사람들은 강력한 국가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강력해야 구성원 모두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 강력한 공동체가 정말로 구성원에게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지는 국가의 탄생 이후로 수 천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고대의 거대 건축물들은 강력한 국가 속에서 소수의 권력층만이 공동체의 유익을 독점해왔다는 반증입니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소수가 아닌 다수가 누리기 위해 공동체의 형태는 도시국가부터 민주사회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해왔지만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라는 미국에서조차 여전히 고통에 짓눌리며 억압 받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강력함 이면에 숨어있는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 가장 강력하게 구성되었다고 여겨지는 국가 공동체의 불완전성은 “사람은 왜 함께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존만이 그 답변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엄마가 자녀에게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지”라고 가르치지만,”왜요?” 라는 질문이 들어올 때, “그래야 생존에 유리하니까”라는 답변이 상당히 괴리감을 주는 것처럼 공동체는 소중한 자유의 일부를 지불한 구성원들에게 생존 그 이상의 것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글에서 나눌 동화 커다란 순무는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안전과 풍요를 위해 열심히 내달리는 우리 공동체가 잃어버린 가치에 대해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인 우크라이나는 기름진 농지가 국토의 약 40%를 차지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며 다양한 농산물을 생산합니다. 그 중 순무는 빠르고 쉬운 재배방식 때문에 대대로 서민들의 식탁을 책임지는 고마운 작물이었습니다. 삼국지의 영웅으로 유명한 제갈공명은 전쟁이 장기화될 때 안정적 보급체계를 위해 영내에,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며 영양분이 풍부한 순무를 심게 했다고 합니다. 동화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역시 평범한 서민이었나 봅니다. 그 역시 순무 씨앗을 심습니다. 그런데 워낙 비옥한 땅이라 그랬는지,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뽑을 수 없는 크기의 순무가 자라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끙끙대다가 할머니를 부르고, 그래도 안되니 손녀를 불러 같이 순무를 당깁니다. 순무가 도저히 뽑힐 생각을 않자 집안에서 같이 살던 강아지, 고양이, 생쥐까지 나와서 순무를 당깁니다. 각색한 동화에는 가끔 말이나 소처럼 힘 센 동물이 나오지만 원작에는 순무를 심는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 할머니와 어린 손녀, 마소처럼 강인하지 못한 강아지, 고양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쥐까지 모두 평균적인 시선으로 볼 때 상위계층에 속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들만이 등장합니다. 공동체의 제일 목적이 생존이라면, 동화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강자를 찾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가족들은 생존이 아닌 함께함 그 자체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비록 왕자님이나 용사처럼 특별한 혈통을 지니고 태어났다거나, 초인적인 강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모든 구성원이 포기하지 않고 어려움을 마주합니다. 어려움 앞에서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불렀을 뿐이지만, 어느새 돌아보니 숨어 살던 생쥐까지 나와서 조그만한 팔다리를 보태서 순무를 잡아당기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가족들 중 단 한명도 뽑히지도 않을 순무를 부여잡고 뭐 이리 고생하느냐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힘을 합한다면 반드시 순무를 뽑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움직였습니다. 함께함은 같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물리적 개념 이상의 하나의 정신을 공유한 상태라는 것을 동화는 할아버지 가족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빨라 봤자, 하늘에 나는 갈색매에 비하면 기어다니는 수준입니다. 돌고래처럼 수영을 잘하지도 못하고, 코끼리처럼 힘이 세지도 않은 사람은 자신의 무기가 지성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지성조차 하루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다고 여겨졌던 전염병 앞에서 용감히 맞서싸우는 2020년의 대한민국처럼, 아무리 강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몸과 마음이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는 반드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화는 커다란 순무를 뽑으며 끝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가족들이 신나게 즐기는 순무 파티는 공동체의 목적이 오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함, 즉 생존에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이란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는 존재지만, 그 한계의 영역이 저마다 다르기에 커다란 순무가 자라나도 아무 불편 없이 혼자 뽑고, 혼자 팔고, 혼자 먹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만약 공동체로부터 영원히 격리되어 대화와 교제의 대상이 전무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맛있는 음식, 호화로운 집과 고급스러운 옷가지가 아무 소용 없을 것입니다. 경이로운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린다해도 보여줄 사람이 없으니 의미가 없습니다. 오로지 생존을 목표로 움직이는 공동체는, 욕구가 충족되고 난 뒤 오히려 서로를 생존에 걸림돌로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순무를 뽑고 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가축들을 내쫓지 않습니다. 어쩌면 더러울지도 모르는 생쥐까지 함께 순무파티에 초대합니다. 함께함이라는 가치를 포기하면서까지 풍요를 누리고자 한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행복이 순무 파티에는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커다란 순무를 홀로 독차지하고 싶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침내 혼자 뽑는데 성공했다면, 도대체 무슨 기쁨이 그에게 있겠습니까. 애당초 할아버지가 순무 씨앗을 심은 이유도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똑같이 순무를 뽑는데 애먹은 할머니지만 다른 가족들이 쉴 때, 공동체를 위해 정성스럽게 요리를 준비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여준 헌신과 희생은 그들이 함께함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성취했을 때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의 존재는 정말 귀합니다. 순무 파티는 공동체의 존재 목적이 생산이 아닌 협동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생산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이유지만, 그것은 목표가 아닌 과정입니다. 생산과 협동의 가치가 전도되지 않을 때, 비로소 “왜 함께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당당히 답할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건강한 가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스스로 밥을 해먹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듯이, 모든 인간은 가정이 필요합니다. 의식주를 해결해 준다고 해서 건강한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의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품, 가정 안에서 세상을 만나고 용기를 기르며 자아를 형성해갑니다. 가족 공동체는 어린 아이가 안정감 속에서 걷기, 말하기, 그리기에 도전할 수 있는 집이 되어주며, 밖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오면 위로해주고 아이를 지배하려는 상처에 같이 맞서 싸워주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사람은 사랑을 하고 도전을 하는, 자아를 실현하는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적 발달뿐만 아니라 정신적 발달이 가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인류의 모든 성숙은 공동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누군가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고 함께 문제 해결에 도전할 수 있는 공동체는 인간의 생존 그 이상을 넘어서 존재함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합니다. 순무를 뽑은 뒤, 순무 파티를 열며 즐거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단순한 에필로그가 아닌 동화의 핵심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가족의 마지막 모습을 행복한 순무 파티로 그려낸 동화는 함께함을 통해 어려움은 함께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넘어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제시합니다. 하나로 합쳐진 두 점의 물방울에게 ‘사이’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이’라는 말은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는 다른 두 존재 간의 간격을 의미합니다. 할아버지 가족들에게도 이 간격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의 목표를 향해 힘을 모으고 있다 할지라도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이고 할머니는 할머니입니다. 함께한다 해도 작은 생쥐가 강아지처럼 힘을 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모두 외모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각자가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다릅니다. 이 간격이 함께함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할아버지는 생쥐에게 별로 도움도 안되었으니 조금 먹으라고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순무를 잡아당길 때는 다같이 힘을 합하고, 요리하는 사람은 왜 나 혼자냐고 투덜거리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요리를 대접합니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원래 사이가 안 좋은 동물입니다. 심지어 고양이는 본능적으로 생쥐를 잡아먹지만 순무를 뽑기 위해 힘을 합칩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이겨낸 뒤, 그들은 왜 너는 나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나와 왜 다르냐며 대립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가족들은 서로가 모두 달랐지만, 다름을 충분히 수용합니다. 생쥐가 강아지만큼의 힘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생쥐에게 넌 도움도 안되었다는 말은 생쥐의 존재감을 부정합니다. 자기가 더 많이 고생했기 때문에 더 많이 누려야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할아버지 가족 공동체 속에서, 주어진 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한 것만으로 생쥐는 당당하게 순무 파티에 함께합니다. 우리는 왜 함께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생존을 위해서로 수렴된다면 멀고 험한 삶의 길에서 버리고 버림받는 사람들은 나와 너를 가리지 않고 끝없이 생겨날 것입니다. 어쩌면 생존이라는 목표에 적합한 인원만으로 구성된 나와 너의 구별이 희미해진, 다름이 약함, 가난함, 불편함으로 인식되는 세상이 도래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약함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며 보호받고 품어주어야 할 이유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약함이 있으며 그것이 돌봄 받는다는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줍니다. 다른 사람의 다름을 인정하고 또 나와 다른 너에게 나만이 줄 수 있는 도움을 주는 기쁨도 돌봄 받는 기쁨에 못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격이 있는 그대로 존중 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는 다름을 인정하는 다양성 위에서 배양됩니다. 참 된 우리가 서로 다른 나와 너로 이루어지는 원리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는다면, 잠깐 동안 남겨진 자원을 독점하며 전능감에 취한다해도 결국 영혼을 치명적으로 파괴하는 고독 속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것입니다.
커다란 순무는 농노가 해방된 후 본격적으로 풍성한 소출을 내면서 동시에 막대한 세금에 시달렸던 19세기 말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동화 작가 이반 플랑코는 커다란 순무처럼 수많은 부를 창출하면서도 그로 인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독점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할아버지 가족과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우크라이나 공동체가 속상했었을지도 모릅니다. 동화는 할아버지 가족의 행복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함께함의 가치를 제시했지만,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 공동체는 이후 20세기 초반 발발한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극심한 대립으로 치닫습니다. 나와 다른 너를 제거하는 폭력 위에서 자라난 소비에트 연방은 이반 플랑코가 커다란 순무 이야기를 발표한지 꼭 100년이 지난 1991년 생산이라는 결과도 얻지 못한 채 공동체의 파괴를 경험합니다. 그의 소망이 오롯이 담긴 동화 커다란 순무를 아이들과 읽으면서 함께함의 가치에 대해 알아보고, 하나하나 다른 우리가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준다면 얼마나 좋을지 나누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할아버지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떠나고 싶지 않은 사회를 꿈꾸는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집단이 아닌 서로의 디딤돌이 되는 공동체를 가꿔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