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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Mar 25. 2017

범죄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이 던지는 물음


어렸을 때 짧은 어린이용 소설로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드디어 <죄와 벌>을 제대로 읽어보게 됐다. 무려 605페이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분량. 이런 책을 단 150페이지로 어린이들을 위해 요약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기억 속의 <죄와 벌>은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가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 소냐를 만나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수한다는 그런 단순한 내용을 갖고 있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죄와 벌>은 단순히 죄를 짓고 벌을 받는 내용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었다. 


인간은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나뉜다?

과연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거부하고, 규칙을 준수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한다. 반면 비범한 사람들은 그들로 인해 세상이 바뀔 수 있고, 그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법 위에 군림할 수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대표적으로 나폴레옹을 예로 든다. 나폴레옹은 단순하게 보면 범죄자이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바꿀 수 있던 힘이 있었고, 비록 범죄를 저질렀지만 훗날 사람들은 그를 찬양했다. 비록 비범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처형당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뉘우칠 필요가 전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현재를 지배하지만 비범한 사람들은 미래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 또한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한 사람이 아닐까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는 '비범한' 그가 자신의 능력을 펼치기 위해서 가난을 탈출해야 하고, 전당포 노파를 죽이는 것은 비범한 자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도끼를 들고 노파를 찾아가 잔혹하게 살해한다. 


비범한 사람의 목적 달성을 위한 살인은 정당하다?

여기서 시사점은 자수하러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악마'가 자신 안에 들어와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탄한다.  자신은 비범한 사람이 아니며, 그저 범죄를 저지른 살인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비범한 사람은 법 위에 군림한다는 그의 사상을 버리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죄와 벌>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그가 소냐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는데, 이는 그저 책에 암시만 되어있을 뿐 확신할 순 없다. 책 말미까지도 자신의 살인의 정당성을 부르짖던 라스콜리니코프의 모습에선 회개의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다. 난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라는 '거대한' 선, 즉 기독교 앞에서 자신이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인간 내면에 있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자수하러 갔다고 본다.


기독교적 박애주의적 시선으로 풀어가는 한계

결국 이 책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에 대해서 우리가 갖는 의문점을 풀어주진 못했다. 정말 이 세상은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나뉘어있는 것일까. 그리고 비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목표를 위해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범죄를 행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에겐 정말 살인을 저지를 '권리'가 있는 것일까? <죄와 벌>의 시대적 배경은 당시 러시아의 불의를 해결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심지어 범죄도 허용된다는 허무주의적인 초인 사상이 유행했던 시기였다.  <죄와 벌>을 지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소냐라는 인물을 통해 '목적이 정당해도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면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러시아 사회에 부르짖고 있었다. 하지만 소냐는 기독교라는 박애주의적 종교를 통해 이런 '선'을 강조하므로 기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에겐 사실 큰 설득력이 없다. 


종교의 힘없인 해결이 불가능한 것인가

라스콜리니코프 역시 무신론자였지만 소냐로 인해 결국은 하나님을 믿게 된다. 기독교적 박애주의적 시선에서 봤을 땐, 당연히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 어떤 목적을 지녔든 간에. 그러나 기독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무서운 이론을 격파할 순 없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과연 난 비범한 사람일까 아닐까. 비범한 사람이라면, 범죄를 저질러도 되는 것일까.  <죄와 벌>은 내게 풀리지 않는 하나의 수수께끼를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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