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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Apr 01. 2017

해방, 그리고 전쟁의 아픔

박완서의 아프도록 생생한 기억,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제목은 다들 알지만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은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사실 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수필이라고 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안 서는 문학작품이다. 작가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도입부에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 보았다'라고 밝힌다. 사실 우린 글을 쓸 때 과거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쓰는 경우가 많다. 기억력에 의지해서 쓴다는 것은 상상력을 발휘한다에 또 다른 말이라 생각된다. 대한민국의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그 시대를 살아봤던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큰 기회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내게 선뜻 선물해줬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박완서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교에 입학하기까지의 유년의 기억을 소설로 각색한 작품이다. 그녀의 유년시절은 참으로 다이내믹하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역사의 증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편의 역사책을 보는 듯했다. 다만 일반 역사책과 다른 점이라면, 평범한 사람의 시선으로 민중들이 끔찍한 환경으로 인해 고통받고, 핍박받는 모습을 박완서만의 굉장한 묘사력으로 표현되었다는 점. 


박완서만의 표현력은 범접할 수가 없다

박완서의 묘사력은 정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돋게 만드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 책 초반부에 박완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로 어머니와 학업 때문에 상경을 하게 되는데, 그때 기차역에서 할머니와의 이별 장면은 감수성이 메마를 대로 메마른 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데엔 손색이 없었다. 

나는 온몸으로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얼굴만 얼음장에 눌리듯 사정없이 퍼졌을 뿐 한치도 할머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기차는 크고 구슬픈 소리를 내지르고 나서 움직였다. 전송객도 따라 움직이다가 점점 안 보였다. 나는 할머니도 따라 움직였는지 그냥 서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펑펑펑 눈물이 마구 나왔다. 눈물이 안 나오는데도 소리 내어 운 적은 많아도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오는데 엉엉 소리를 내지 않기는 생전 처음이었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pg. 44

함께 살면서 정들었던 할머니와 난생처음 헤어지는 장면은 한 편의 슬픈 영화를 연상케 했다. 


박완서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에 대한 생생한 묘사도 일품이다. 일제시대 때 딸과 아들의 교육을 위해 희생하는 박완서의 어머니. 그런 자신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항상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절대로 기죽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머니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었다. 남편도 없는 상황에서 기생 바느질로 가정을 유지하면서 아들과 딸의 학업을 성공적으로 뒷바라지한 박완서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식에게 한없이 희생적인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떠올랐다.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표현

앞서 설명했듯 박완서의 유년은 혼돈의 시기 그 자체였다. 일제시대에서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상당한 이념 대립이 있었다. 그러한 이념 대립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사람은 박완서의 오빠였다. 박완서의 오빠는 공산주의 이념에 빠지게 됐고, 좌익에 가담하게 됐다. 그러한 오빠를 바라보며 박완서의 어머니는 하염없이 걱정을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오빠는 인민군의 의용군으로 차출당해 징용되어버렸다. 그런 오빠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정말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결국, 오빠는 돌아오지만 전쟁의 후유증으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모습은 소설에서 생생하게 묘사됐다. 

집에 돌아왔는데도 조금도 기쁜 기색이 없었다. 자기가 없는 동안에 태어난 아들을 보고도 안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렇다고 무표정한 것 하고도 달랐다. 시선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작은 소리에도 유난스럽게 놀랐다.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은 무슨 소리를 해도 바뀌지 않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pg.264

가족들의 몸 상태와 재정 상태로 인해 미처 박완서의 가족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현저동에 남게 된다. 전쟁으로 모두가 떠나버리고 텅 빈 현저동을 바라보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은 막을 내린다. 


한 사람의 삶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줬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수필이나 자서전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깨달았던 것 같다. 내 인생은 한정되어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은 많지 않다. 하지만 박완서의 수필을 읽으면서 일제시대 때, 해방 직후, 그리고 한국 전쟁 때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훗날 수필을 쓰게 되면,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아 그때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라는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다. 딱딱한 역사책으로 읽었던 것과는 달리, 박완서의 기억,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혼란의 시대 때 희생당한 많은 무고한 시민들과 그들이 느낀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게 해준 의미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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