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연 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쾀 Oct 09. 2017

그녀는 내 영웅이 되었다

출근길 버스에서 만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녀


'삐빅, 카드를 한 장만 대주세요'


아차, 지갑에서 학생증을 안 빼놓았구나. 버스 기사님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얼굴에 놓이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지갑을 허겁지겁 열어서 체크카드 한 장을 빼서 단말기에 갖다 댔다.


'삐빅, 잔액이 부족합니다.'


맙소사. 더운 날씨에 살짝 상기되어 있던 내 얼굴은 터질 듯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맞다. 어제 돈 다 떨어졌었는데. 잔돈도 없는데. 이 버스 안 타면 지각인데.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은 어느새 가슴에서 얼굴로 올라와있었다.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과 뒤에 줄 서있는 사람들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냥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  


'두 명이요. 타세요'

 

뒤에서 누군가가 카드를 대면서 툭 던진 말은 내 몸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아니 거의 빠져나간 영혼을 다시 붙잡았다. 아찔하다 못해 혼미했던 정신은 어느 순간 다시 깨끗해졌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버스 기사님의 짜증 섞인 헛기침을 듣고 황급히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출근길, 오전 8시 반의 버스 승객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버스 단말기 앞에서의 내 악몽은 10초도 안 돼서 끝났지만 나에게도, 버스 기사님에게도 그 시간은 영겁의 시간 같았겠지.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고 싶었던 내 은인은 순식간에 버스 안에 가득 찬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두 명이요. 타세요'라고 말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수능 금지곡 마냥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 퍼졌다. 그녀의 단 두 마디는 요 근래 들었던 어떤 소리보다 감미로웠다. 비록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지 못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을 거야.


어쩌면 내가 불쌍해서 돈을 내준 게 아니라, 뒤에 기다리고 있는 승객들과 버스기사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내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겠는가. 그녀가 더 낸 1200원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냈는데. 그중에서도 내 행복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영웅이 되는 것. 거창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메리 제인에겐 스파이더맨이 있고, 레이첼에겐 배트맨이 있다. 나에겐 내 버스비를 선뜻 내준,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그녀가 있다. 그녀 덕분에 난 늦지 않고 전공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적에서 출석 비율이 무려 15%나 되는, 출석이 중요한 수업이다. 지루한 1교시 정치학 수업을 들으면서도 난 졸지 않고 계속 그녀 생각을 했다. 영웅 되는 거 굳이 거창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살인자 12명을 잡은 강력 형사가 되지 않아도, 불타는 건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내는 소방관이 되지 않아도, 영웅은 충분히 될 수 있다. 그녀는 날 금방 잊어버리겠지만, 단 1200원 만으로 그녀는 내게 오랫동안 기억될, 아니 어쩌면 평생 기억될 영웅이 되었으니까.


먼저 나서서 남을 도와주는 마음. 당연해 보이고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그 마음 하나면, 누군가에겐 영웅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겐 영웅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다가 결국 잠에 빠져버렸다. 역시 1교시는 힘들어.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스 아메리카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