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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Sep 23. 2017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반 커피 반 주세요

지금 어디에 계세요? 저 이제 도착했어요.

아 저 카페 안에 있습니다. 체크무늬 셔츠 입고 있는 게 바로 저예요.

바로 들어갈게요!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만났다. 아마 그녀는 내 얼굴보단 체크무늬 셔츠를 믿고 내가 앉아 있는 카페 구석자리로 찾아온 것이겠지. 난 카페를 가면 습관적으로 구석자리로 간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못하는 가장 조용한 곳. 주변 사람들이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 커피를 엎지를 위험도 없는 곳을 습관처럼 찾아간다. 심지어 오늘같이 내 비루한 인생에 몇 없는 소중한 날에도 난 어김없이 구석에 앉아있다. 사람의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괜히 불안하고 싶지 않아서 본능적으로 찾아갔나 보다.


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 독심술사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의 표정을 아주 잘 읽는다. 사람이 실망했을 때 짓는 표정은 그 누구보다도 익숙하다. 입시에 실패했을 때 부모님의 표정, 친구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친구의 표정.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리고 난 그 너무나도 익숙한 표정을 눈 앞에서 보고 말았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래, 사진은 좀 정직한 거 쓸걸 그랬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자리에 앉아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무거운 침묵.


그럼 마실 거 시킬까요?

네, 그래요.


아이러니하게도 난 사랑에 빠졌다. 비록 얼굴 본 지 3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었다. 최근 몇 년간 공포영화를 봤을 때도 쉽게 벌렁거리지 않았던 내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으니까. 비록 우리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만, 난 이 시간을 좀 더 오래 붙잡고 싶었다. 사랑에 좀 더 오래 빠지고 싶었다. 구석자리만 찾아가는 내게, 모든 사람들에게 실망만 주는 그런 검은색으로 가득 차 있던 내게 한 방울의 핑크색이 떨어졌다. 그 핑크색은 결국 검은색으로 물들어버리겠지만, 물들기 전까지 시간을 벌고 싶었던 나.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그런데 얼음 진짜 많이 주세요.

네? 어느 정도로 드리면 되나요?

그냥 커피 반 얼음 반 주세요.


그렇게 우린 앉아서 형식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좋아하는 영화 장르나 음식은 무엇인지... 사실 난 내 입을 통해 어떤 말이 나오고 있고 귀를 통해 어떤 말이 들어오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 온 신경은 눈에 집중되어있었으니까. 그녀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와 빨리 헤어지고 싶은 눈치였다. 그녀의 손엔 순식간에 비어버린 플라스틱 잔이 들려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아메리카노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천천히 마시고 있는 것도 있지만, 담겨있는 얼음이 계속 그녀와 함께 할 시간을 조금씩 채워주고 있었다. 그녀에겐 이 순간 무엇보다도 야속할 작은 얼음들이, 내겐 더없이 소중한 보너스 타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결국 얼음까지 모두 녹여먹은 뒤, 우린 곧바로 카페를 나왔다. 서로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 뒤돌아서 우린 왔던 길로 각자 되돌아갔다.


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담겨있던 얼음이 빙하였으면.


그렇게 핑크색은 검은색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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