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r begets anger.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
죽은 딸의 범인을 찾지 못한 경찰에 대한 어머니의 분노는 세 개의 빌보드에 고스란히 담겼다.
엄마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 도로에 서있는 3개의 대형 광고판에 다소 자극적인 광고를 실어서 세상의 관심을 받는다.
내 딸이 죽었다.
그런데 아직도 못 잡았다고?
어떻게 된 건가? 월러비 서장?
이 광고판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경찰서장 월러비(우디 헤럴슨)는 무능하고, 경찰 자격도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심지어 밀드레드는 방송 인터뷰에 출연해서, 경찰들의 무능함에 대해 비판하기까지 한다. 사실 월러비는 마을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던 사람이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밀드레드의 광고판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괜히 그녀의 가게에 와서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그녀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밀드레드의 분노를 넘어선 '광기'가 담긴 광고판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달라는 거친 광고는 그녀의 분노를 넘어선 '광기'를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빨간 바탕에 큼지막한 검은 글씨로 적혀있는 문구들은 섬뜩해 보인다. 점점 그녀의 편은 사라져 간다. 암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는 월러비를 상대로 너무한 거 아니냐는 주민들의 여론은 점차 커져만 간다. 암 투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힘들어할 주변 가족들을 위해, 월러비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월러비의 자살로 인해, 밀드레드를 향한 비난의 화살은 더욱 거세졌고, 누군가가 그녀의 3개의 광고판에 모두 불을 지르기까지 한다. 불타버린 광고판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복수를 다짐한다. 그녀는 화염병들을 던져서 경찰서를 불태워버린다.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
<쓰리 빌보드>에는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자신의 딸을 잃은 분노가 만들어낸 세 개의 광고판들. 과연 광고판을 세워서 경찰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었을까. 광고에 실려있던 월러비 서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경찰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범인을 잡기 위해, 월러비 역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증거나 목격자가 너무나도 부족해서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미국의 많은 경찰들이 흑인이나 다른 유색인종을 폭행하거나 괴롭히는 등, 무능하고 '더럽기도' 하지만 이들 역시 미국의 경찰관들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 일부를 지목하면서, '봐 너네가 그렇게 무능하니까 내 딸의 범인을 못 잡는 거야' 라며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밀드레드의 광기 어린 분노는 결국 월러비의 자살로 이어졌고, 그의 부인, 그를 좋아하던 마을 사람들의 분노를 낳았다.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그녀의 수사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경찰서를 불태워버리는 그녀의 선택에서 우린 알 수 있다. 밀드레드의 마음속에는 범인을 찾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음을.
미국에 대한 고발도 살짝 담겨 있는 영화
<쓰리 빌보드>에는 미국에 대한 고발도 살짝 담겨있다. 지위를 남용하고, 시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경찰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쓰리 빌보드>에는 딸을 살해한 범인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범인이 아니었던 장면이 있다. 강간범이긴 하나, 밀드레드의 딸을 강간하고 죽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으나, 그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 파병되었던 군인으로 현지에서 누군가를 강간하고 살해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쓰리 빌보드>의 미국 경찰과 군인에 대한 풍자 비판은 영화를 본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쓰리 빌보드>는 밀드레드 딸의 살해범을 찾는, 그런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밀드레드의 마음속엔 분노가 점점 쌓이는 게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분노가 쌓일수록 그녀는 더욱 망가져간다. 자신의 딸을 잃은 분노는 그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낳고, 무고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 시작한다면, 그 분노는 멈추어야 할 것이다. 다소 거친 농담과 어두운 분위기를 통해 꽤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영화 <쓰리 빌보드>. 분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어준 이 영화의 의도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