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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Jan 02. 2019

진짜, 혹은 가짜 감정

영화 <그녀>가 인공지능 사만다를 통해 던지는 물음

과연 사람의 진짜 감정이란 무엇일까. 깔깔 웃는 사람을 보면 그냥 웃음이 난다. 마찬가지로 슬퍼하는 사람의 눈물을 보면 괜히 코가 시큰한 것은 진짜 우리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사람의 감정이 그냥 우리에게 투영된 것일까. 그냥 남이 하품을 하면 따라 하품을 하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그 감정은 진짜 감정이 아니라, 가짜 감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엔 이 남자가 인공지능 로봇일줄 알았다

<그녀>는 바로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을 하는 테오도르는 아내와 이혼 절차를 밟으며 별거 중이다. 그러다가 자신의 컴퓨터에 깐 인공지능 사만다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테오도르도 처음에는 사만다가 프로그램이니 매뉴얼대로 하는 거겠지, 하며 사만다의 감정을 가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담도 덜 느꼈다. 왜냐하면 진짜 사람의 감정이라면 상하기도 할 테지만 프로그램은 그렇지 않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만다는 점점 더 사람보다 더 사람 같아진다. 안 그래도 결혼 생활에 불만이 있었던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모두 채워줄 수 있는 존재였다. 늘 밝게 자신을 반겨주고, 재치 있는 사만다.

우울했던 테오도르의 삶에 웃음이 가득!

놀라운 건 둘 간의 사랑이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이라는 것이다. 테오도르가 혼자 사만다를 짝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만다 역시 테오도르를 사랑한다고 밝힌다. 심지어 사만다는 자신이 육신(?)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자신과 대리로 테오도르와 성관계를 맺어줄 사람까지 구하기도 한다. 프로그램 치고 대단한 열정을 보이는 사만다가 살짝 부담스러워진 테오도르는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사만다는 삐지기까지 한다. 결국 둘은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자며 합의를 본다. 사만다는 육체가 없음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프로그램임을 인정하겠다고 하고, 테오도르도 이를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한다(감히).  그렇게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노후까지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너만 들린단 말이야~

역시 영화가 그렇게 행복하게 끝나진 않는다. 사실 당연한 것이지만,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사용하듯, 지구에 있는 수천 명도 사만다를 사용하고 있다. 테오도르는 이 사실을 깨달은 후 굉장한 충격에 빠진다. 나 포함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니. 사만다는 자신의 사랑은 진실된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프로그램이 아닌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수천 사랑을 인정해줄 수 있는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가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이 스스로 너무 많은 걸 학습해버려서 사용자들을 떠나버리게 되고, 테오도르는 다시 홀로 남는다.

몇달간 질질 끌던 이혼도 사만다 때문에 단칼에 했는데.

어쩌면 테오도르와 인공지능은 놀랍도록 닮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테오도르는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을 한다. 편지는 감정의 집약체이다. 편지 한 통에는 늘 감정이 담겨있다. 사연을 듣고, 편지를 쓸 때, 테오도르는 그 일이 마치 자신에게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감정도 감쪽같이 만들어낸다. 눈물까지 글썽인다. 그 결과 더 몰입감이 넘치고, 감동이 있는 편지를 쓸 수 있게 된다.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은 사실 자신의 여자 친구 혹은 어머니의 감정이 아닌, 테오도르의 감정을 느끼게 다. 그리고 그 감정을 진짜라고 느낄 것이다. 테오도르가 감정을 만들어냈듯, 인공지능 역시 감정을 만들어냈다. 테오도르는 그 감정을 진짜라고 느꼈지만, 사실 테오도르가 하루에도 수 백 명에게 사랑이 담긴 편지를 쓰듯, 사만다 자신의 사랑의 메시지를 수백 명의 사용자에게 보냈을 뿐이다.  

수 백, 수 천명이 이런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테오도르가 편지를 대신 쓸 때 느꼈던 감정, 사만다가 테오도르에게 속삭였던 사랑의 감정들은 과연 진짜일까 가짜일까.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목적성을 띈 수동적인 감정도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그녀>는 사람의 감정에 대한 깊은 물음을 인공지능이라는 참신한 소재를 이용해서 던진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앞으로 더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PS: 영화에서 사만다의 목소리 연출은 스칼렛 요한슨이 했다. 영화 볼 당시엔 이를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몰랐던 게 다행이었던 거 같다. 알았으면 사만다에 대한 편견이 생겼을 뻔. 몰랐기에 사만다의 모습을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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