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을 시니컬하게 만들 봉준호 감독의 작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할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를 보기 전에 칸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영화가 그저 이해하기 어렵고, 쓸데없이 사회적이고, 지나치게 심오할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봉준호라는 감독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점도 없잖아 있다. <기생충>을 보기 전까지 내게 봉준호라는 감독은 그냥 시니컬한 농담을 좋아하는 상상력 풍부한 사람이었다. <괴물>, <설국열차> 등등 그 설정 자체가 참신하고, 중간중간 피식하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웃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던 그런 영화들. <기생충>에도 물론 그런 요소들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지만 이 영화엔 그런 '봉준호다움'이 극대화되어있다. 그래서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의 장르가 봉준호 그 자체라는 평을 받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깊숙이 스며들어있는 빈부격차를 다소 과격하게, 우스꽝스럽게 '기생충'이라는 메타포로 풀어낸 <기생충>은 황금 종려상을 받을만하다.
숙주 덕분에 살 수 있지만 결국은 숙주를 죽이는
기생충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생물체다. 숙주 덕분에 살 수 있지만, 결국 숙주를 죽이는. 숙주가 없으면 살 수 없으면서도 결국 기생충은 영양분을 다 빨아내고 각종 질병을 통해 숙주를 죽인다. <기생충>에서 반지하 가족은 기생충 '그 자체'다. 와이파이도 윗집 와이파이를 몰래 쓰고, 길거리 소독을 하면 창문을 열어서 집안 소독도 덩달아서 하려고 한다. 부잣집에 들러붙어서 돈을 빨아먹으려 하지만 결국 그 가족을 파멸시킨다. 숙주가 죽지 않는 적당한 선을 지켜가면서 기생해야 하는데, 고마울 줄도 모르고 만족도 모르는 기생충들에겐 그런 선이 없다. 온 가족이 들러붙어서 빨아먹는 바람에 그들은 소중한 숙주를 잃고, 본인들은 안타까운 최후까지 맞이한다.
사실 영화의 모든 부분은 기생충의 특징을 담아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계획이 있는 아들과 아무 계획 없이 사는 나머지 가족들. 한 가족 안에서도 아들에 기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외 선생을 좋아하는 부잣집 딸의 훈훈한 남자 과외 선생이라면 가리지 않고 붙어서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이 기생충 같다.
냄새라는 꼬리표
기생충처럼 우리 몸에서 잘 안 떨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냄새'다(기생충 하면 뭔가 냄새가 날 거 같기도 하다). 잠깐 나는 냄새가 아니라 꾸준히 나는 그 사람만의 '체취'. 누군가에게 냄새가 난다고 하면 보통 화들짝 놀라는 게 대다수일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은 그 냄새에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무슨 냄새가 나고 있을까. 서울 사람 냄새가 날까. 받는 월급이 높아지면 더 향기로운 냄새가 날까. 우리는 냄새에 민감하고, 냄새로 판단하고, 냄새로 상상한다. <기생충>에는 냄새라는 메타포가 영화 전반에 깔려있고, 냄새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큰 영향을 준다.
<기생충>에서 반지하에서 늘 살고 있던 사람들 몸에는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가 난다. 그들에게 잘해주던 사람들도 그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를 맡으면 그 냄새가 기생충처럼 옮겨 붙을까 걱정되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도망친다. 그들에게서 나는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는 없애고 싶어도 떨어지지 않는, 섬유 유연제나 비누로도 덮을 수 없다. 아예 삶의 환경이 바뀌어야 없어지는 존재다. 그리고 그 환경은 쉽게 바뀌지 않지.
온 국민이 시니컬해질 거 같다
<기생충>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숙주를, 또는 다른 기생충을 파멸시키는 기생충의 특성을 봉준호 감독만의 스타일로 잘 담아냈다. 이 영화는 대중적인 영화가 분명히 아니다. 액션이나 CG가 가득하거나 특정 역사적 사건(한국인이라면 봐야지!)을 다룬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가 끝난 후 느껴지는 감정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본 기분과 흡사했다. 여운이 남지만 결코 기분 좋은 여운이 아닌.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혹시 나는 기생충이 아닐까' 하며 시니컬해질 거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