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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Jun 11. 2019

죽음 앞에서 우린
놀랍도록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킬링 디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기묘한 감독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다면 개연성은 굳이 개의치 않는다. 청중 입장에선 황당하다. 엥? 그래서 왜 죽는 건데?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건데? 감독은 굳이 청중의 불편함을 해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냥 그에게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것이니까. 마치 해리포터에서 해리가 망토를 쓰면 투명해지는 것에 대해 아무도 불편함을 가지지 않듯, 우리도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을 볼 땐 그의 세계관에 몰입할 필요가 있다. 

<킬링 디어>는 자신의 죽음, 또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심리를 잔인하리만큼 생생하게 묘사한 영화이다.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자식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강렬한 모성애, 혹은 부성애가 자주 나타난다. 하지만 정말 인간은 자신의 죽음과 자식의 죽음 앞에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애가 아직 어리다면, 너무나도 잔인하지만 '다시 낳으면 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란티모스는 차마 상상도 하기 싫은 그런 인간의 잔인한 면모를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남편이 부인, 아들, 딸 셋 중 한 명을 죽이지 않으면 셋 모두 죽는 그런 '이유 모를' 저주에 걸린 극단적인 상황은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잔인한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기엔 가장 최적화된 세팅이다. 그들은 가족이지만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부인은 남편에게 아이 둘 중 하나만 죽이자고, 아직 충분히 애를 가질 수 있다고 어필한다. 딸은 오히려 자신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겠다며 아버지에게 복종을 맹세한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며 감성팔이를 시작한다. 결국 남편은 랜덤으로 한 명을 정해서 총으로 쏴 죽인다. 아들이 죽자 그들에게 걸렸던 저주는 모두 풀려난다. 

제목이 <킬링 디어>인 이유는 이 영화가 그리스 신화 중 <아가멤논>에서 모티브를 얻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설명하긴 귀찮으니 간략하게 포인트만 말하자면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가 아끼는 사슴을 사냥했고,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다. 그의 딸이 제물로 바쳐질라는 순간, 아르테미스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를 구름으로 감싸서 데려가고, 제단에는 사슴을 대신 놓는다. 영화에서 크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진 않는다. 그냥 감독이 만들어 놓은 세팅의 배경 정도랄까..


죽음 앞에서의 인간을 잔인하리만큼 생생하게 묘사

인간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이기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는 지를 다룬 <킬링 디어>는 인간 본성을 넘어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결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끔 만들어준다. 눈치채지 못할 뿐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라는 약간의 확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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