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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Jun 12. 2019

우린 꼭 닮아야 사랑할까?

<더 랍스터>

그렇다. 또 봤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을 또 보고 말았다. 란티모스 감독의 <더 랍스터>는 역시나 '란티모스'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킬링 디어>에서 그랬듯, <더 랍스터> 역시 죽음을 눈 앞에 둔 인간의 본성이 잘 담겨 있다.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하는 호텔이 이 영화의 기묘한 배경이라는 것 빼곤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죽음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란티모스 감독이 생각하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인간의 본성'은 어느 정도 한결같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신, 란티모스 감독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죽음과 사랑. 이 둘은 처절하면서도 미스터리 하다는 점이 닮았다. 누구나 그 앞에 서면 간절해지지만 정작 그 이유는 알지 못하는 존재. 그래서 란티모스 감독이 이런 주제를 사랑하는 것 같다. 간절한 감정 앞에선 인간의 진짜 본능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더 랍스터>는 인간이 사랑할 때 드러나는 이기적이지만 또 어쩔 수 없는 본성이 잘 담겨 있다. 


우리는 소울메이트를 찾을 때 보통 우리와 닮은 사람을 찾는다. 아니면 닮은 사람과 끌린다. 그런 말 있지 않은가? 사랑하면 닮는다고. 사실은 사랑해서 닮았다기 보단, 닮은 사람끼리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 뭐 물론 예외는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나도 그렇고, 란티모스 감독도 그렇고 비슷한 사람끼리 끌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더 랍스터>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동물이 되어도, 어울리는 상대방을 만나야 한다. 펭귄과 사자는 절대 함께 살 수 없다." 


호텔 직원이 가볍게 남긴 말은 비단 동물이 되었을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면서도 펭귄과 사자가 함께 일생을 같은 집에서 보내지 않듯, 각자의 '종'에 맞는 파트너를 찾는다. 여기서의 '종'이란 외관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바꿀 수 없는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랍스터>의 기묘한 호텔에 머물고 있는 절박한 솔로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짜로 상대방과 닮은 척을 한다. 실제로 닮아서 자연스럽게 커플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닮은 점이 공교롭게도 사라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든 다시 공통점을 만들어내고자 발악한다. 공통점이 없어지면 사랑도 사라지는 것처럼. 


공통점이 없어지면 사랑은 사라질까

과연 영화 말미에 남자 주인공은 눈이 멀어버린 여자 친구와 같은 '종'이 되기 위해 스스로의 눈을 스테이크 칼로 찔러버렸을까, 아니면 도망쳤을까. 열린 결말이지만 인간의 사랑에 대해 낙관 혹은 비관적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예상하는 결말은 갈릴 것이다. 란티모스 감독 머릿속에는 눈에 스테이크 칼을 꽂은 채 비틀거리는 남자 주인공이 들어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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