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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Oct 07. 2019

웃음을 숨기지 않아도 될 때

그는 비로소 조커가 되었다.  <조커>

어쩔 수 없는 한 사람의 문제는 과연 누구의 탓일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요소가 그 문제를 만들어냈을까. 내가 시험 전날에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건 지나친 성과주의의 대한민국 사회 때문인 걸까. 혹은 어렸을 때 전날에 배탈이 나서 시험을 망친 내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일까. 어쩌면 이 둘 모두가 내 예민함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난 중요한 시험 전날엔 굉장히 예민해지며 위층에서 나는 작은 물소리에도 치를 떨며 잠을 설치기도 한다.

<조커>는 전혀 재밌지 않았다.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가 신들린 연기로 보여준 조커라는 안티 빌런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파고든 영화 <조커>는 <기생충>보다도 찝찝한 영화였다. 만화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라, 원작은 어떤 지 모르겠으나 <조커>에서 아서(조커가 되기 전)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이 있다. 뇌신경에 손상을 입어서 웃음이 우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이는 억지로 참을 수조차 없다. 그의 힘겨운 웃음소리는 웃음이 아니라 흐느끼는 소리로 들릴만큼 처절하고 듣기 거북하다. 눈을 감고 들으면 웃음소리와 흐느끼는 소리는 정말 비슷하기도 하다. 다만 차이는 입꼬리의 모습일 뿐이다. 


아서는 조커가 되면서 스스로를 향한 분노를 사회로 돌린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그는 자신이 웃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사회가 자신을 향해 웃어주질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자신은 웃긴 사람이지만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사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조커로 정한 것도 같은 논리이다.  


자신을 향한 분노가 이제 사회를 향할 때, 우린 웃을 수 있다. 사실 남 탓이 제일 신나고 쉽고 편하다. 우리 팀 정글이 못하기 때문에 탑이 터진 거라는 논리는 롤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남 탓의 유형이다. 조커가 입가에 웃음 분장을 하는 이유가 그러한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그의 병적인 웃음은 이젠 간신히 웃음을 참기 위해 토해내는 소름 끼치는 흐느낌이 아니라 정말 웃음이 될 수 있다. 그의 광기는 더 이상 참아야 하고 사회에 보여주면 안 되는 그의 하자가 아니라 사회의 악행을 증명하기 위해 보여주어야 할 상처인 것이다. 



조커의 행동이 하나의 정신병자의 난동이 아닌 변화의 시작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데엔 고담의 문제가 상당히 오랫동안 고착화되어있었으며 해결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조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쏴 죽이는 건 지나친 폭력이라는 생각이니까. 하지만 고담의 빈민가에서 조커는 영웅이 된다. 그의 과격한 행동으로 고담에는 비로소 변화가 찾아왔으니까. 만약 조커가 토크쇼에 나와서 사람을 쏴 죽이지 않고 조곤조곤 말로 했다면 폭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까. <다크 나이트>와 <조커>가 상영될 때 미국에서는 극장 밖에 무장 경찰들을 대기시켰다고 하니.. 조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커>는 상당히 기분 나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술자리에서 재밌게 고민해볼 요소들을 여럿 던져주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이렇게 취업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대학 생활을 성실히 못해서일까, 혹은 이 사회의 문제일까. 두 번째는 만약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이 될 때 어느 정도 수준의 폭력이 용인될 수 있을까.

<조커>는 재밌지 않다. 오히려 어둡고 기분 나쁘다. 뭐, 원래 조커가 어둡고 기분 나쁜 존재니까 영화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호아킨 피닉스가 이러한 캐릭터에 몰입해서 연기를 했다는 것에 정말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다. 히스 레저와는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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