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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Mar 04. 2017

<러덜리스>, 이해를 노래하다

살인자의 아버지가 부르는 이해의 노래 

가끔 뉴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극적인 뉴스. 'OOO대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고가 발생해 다수가 사망하는 사고 발생' 우린 이런 뉴스를 접하면 우선 '어떤 미치광이길래 총기를 난사해서 무고한 학생들을 죽였을까. 분명히 악마 같은 사람이고 인간 말종임이 분명해' 라며 가해자를 비방하고 피해자를 추모하는데 그치곤 한다. 물론 이런 모습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당연히 피해자는 죄 없이 사고를 당했고, 가해자는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범법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묻고 싶은 것은 단 한 번이라도 가해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가해자를 그렇게 만든 원인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우린 가해자의 범죄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러덜리스>는 범죄자의 아버지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들을 이해하는 샘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이해한다는 뜻은 범죄자의 범죄 행위의 정당성을 찾는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계기과 심리를 알고자 하는 노력을 뜻한다. 

<러덜리스>는 대학교 총기 사고 가해자의 아버지, 샘이 아들 죠쉬가 만든 노래의 데모 시디를 우연히 듣게 되고, 이를 한 음악 술집에서 부르면서 시작된다. 그는 이전까진 영화 제목 그대로 'Rudderless'였다. 


rudderless: 미국식 [|rʌdərləs] 영국식 [|rʌdələs] 지휘하는 사람이 없는; 어쩔 줄 모르는


총기 사고가 일어난 후,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요트 안에서 2년 동안 폐인처럼 살았다. 그러나 죠쉬의 유품 안에 있던 데모 노래를 듣고 그를 좀 더 알게 된다. 그의 노래에는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고 낙담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샘은 그를 추모하며 노래를 술집에서 부른다.  뜻밖에도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밴드도 결성하게 되는데, 그의 노래들이 대학교 총기 사고 가해자의 노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그는 결국 밴드에서 나오게 된다. 


살인자의 노래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선 그렇게 열광적이었지만, 좋은 노래들이 사실 살인자가 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더 이상 노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은 범죄자에 대한 사회의 혐오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인자의 노래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말이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우리 사회에선 아직 힘든 것일까. 


영화 말미에 샘은 밴드에서 나와서 처음 노래를 불렀던 술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그 노래의 가사엔 이런 부분이 있다.  

Close your eyes and count to ten.    눈을 감고 10까지 세어봐요
Maybe love's the only answer.           어쩌면 사랑이 유일한 답일지도 몰라요
I will find a way to sing your song.   난 당신의 노래를 부를 길을 찾을게요
Just sing along.                                     그냥 같이 불러요
What is lost can't be replaced.          잃어버린 자리를 다시 채울 순 없죠
What is gone is not forgotten.           떠나간 것은 잊히지 않아요
I wish you were here to sing along   난 당신이 내 곁에서 같이 노래를 했었으면 바라요
My son                                                     내 아들 
My son                                                     내 아들
My son                                                     내 아들

살인자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로썬 불가능이다. 하지만 샘은 아버지였기에 가능했고 이런 아들을 향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누군가에겐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지만 샘에게는 그저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해왔고, 삶에 대한 어떤 태도를 갖고 살고 있었는지를 샘은 그의 노래를 듣고 이해하고, 부르면서 사람들에게 알렸다. 


무엇이 그를 '악마'로 만들었을까

누군가를 이해하는데 꼭 사랑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이해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혐오감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부감을 이겨내고 우리가 노력한다면 그를 좀 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환경과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범죄가가 된 데에는 그를 둘러싼 사회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그 밖에도 다양한 요인이 그를 '악마'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 그를 범죄자로 만들었는지를 파악한다면 똑같은 범죄자가 탄생하지 않도록 사회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증오하고 거부하면서 그를 그냥 '범죄자'로 낙인찍어버리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이다. 그가 만든 노래를 듣는 것조차 혐오하는 것은 더더욱 지양해야 할 것이다. 범죄자를 이해해야지 추후에 발생할 수 있는 범죄 또한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통해 '방지'한다

<러덜리스>는 그런 이해를 노래하는 영화이다. 범죄자들을 그냥 쓰레기로 낙인찍고 사회에서 분리시키는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또 다른 범죄를 방지할 수 있도록 사회를 발전시켜나가자는 그런 희망의 메시지 또한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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