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타자 치는 snoopy


2015년 4월, 분가를 했다. 가락동 아파트에서만 30년을 살았다.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된 것도 처음이었고 빌라(라고 쓰고 연립이라 읽는다) 생활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아파트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별 불편 없이 잘 지냈다. 그런데 겨울이 문제였다. 너무 추웠다. 이불을 산더미처럼 덮고 자도 추워서 자주 잠에서 깼고 웅크리고 자느라 잔뜩 접었던 관절을 펴며 아침에 나선 거실은 시베리아 벌판이었다. 푹 자지 못해 몸은 늘 피곤했고 말할 때 입김이 희끗거릴 정도로 추워서 겨울을 나려면 보일러를 한참 돌려야 했다. 겨울 시즌 난방비도 예상 밖으로 많이 나왔고 돈 들인 만큼 집이 따뜻하지 않아서 우울했다. 이래서 다들 아파트, 아파트 하는구나 싶었다. 이사 다음 해엔 침대 위에 설치하는 텐트를 샀고 작년엔 샤오미 전기난로까지 구입했다. 그래도 겨울나기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고 30년 만에 처음으로 수도 동파 사고까지 겪기도 했다. 그러다 작년엔 JoyfulHaru 님이 보내주신 보온 물주머니가 구세주 노릇을 톡톡히 했다. 밤마다 따뜻한 물주머니를 끌어안고 겨우 잠이 들었다.


작년 봄 위층에 새 주거인(들)이 입주했다. 빌라 1층 현관문 옆 담벼락에 자전거 네 대가 새로 등장했다. 오가다 보니 외국인 노동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새로 입주한 모양이었다. 언젠가부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뭔가로 바닥을 벅벅 긁고 밀고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 11시, 12시에도 예사였다. 전 거주자는 대형 트럭 모는 아저씨. 지방으로 장거리 운행이 잦아 집을 자주 비웠다. 1년 내내 위층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해서 층간 소음 다툼 같은 건 남의 세상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일이 내 일이 되어버린 것. 소음의 빈도가 잦아지고 강도는 점점 세졌다. 몇 개월을 참고 지내다 아침 8시에 소음에 놀라 깬 어느 토요일, 집사람과 함께 위층 문을 두드렸다. 인도 쪽에서 온 것 같은 이웃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손짓 발짓과 단어 몇 개를 이어 붙인 짧은 영어로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고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는 좀 조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외국인 이웃이 난감한 표정을 짓길래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대체 뭘 하는 거예요?" 돌아온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또렷한 발음으로 그의 입을 빠져나온 한국말은 "요리!" ... 그래,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먼 이국 땅에 와서 음식은 입에 안 맞고 악착같이 생활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집에서 손수 음식을 해먹나 보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먹고살겠다고 요리를 하는 거라는데, 거기 대고 차마 뭐라 할 수는 없고 괜스레 미안했다.


다시 겨울이 왔다. 그런데 올해는 뭔가 달랐다. 수은주가 곤두박질칠 때마다 마누라와 나는 이상한 걸 느꼈다.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았는데도, 전혀... 춥지 않다. 겨울이 되면 집 온도가 7~8도 정도였고 외벽에 접한 화장실 문을 열면 황소도 때려 잡을 바람이 휭 몰아쳤는데, 요즘 우리 집 실내 온도는 보통 19도. 보일러나 난로를 쓰지 않아도 그냥 19도. 겨울이면 내 방에 앉아 있지 못할 만큼 발목이 시려서 야심차게 장만한 꽃덧신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조이풀하루 님 보온 물주머니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자리에 누우면 입김이 나던 안방은 포근해졌고 추위 때문에 자다 깨는 괴로움은 철 지난 유행처럼 사라져버렸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대체 왜...? 생각해 보니, 윗집 외쿡 총각들 때문이었다. 누군가 단독주택 생활의 장단점을 기록한 SNS 글에서 읽었던 내용이 불현듯 생각났다. '아파트는 사방에서 난방을 하면서 이웃집을 덮혀주는 방식인데 단독은 말 그대로 단독. 혼자 오롯이 난방을 해야 한다. 특히 단열시공이 그지 같은 집이라면, 난방의 절반은 지구를 덮히는데 사용된다'라는 구절이. 위층 이웃이었던 트럭 아저씨는 집을 하도 비워서 난방을 거의 안 했던 것이고 덕분에 우리 집은 단독주택 난방하듯 지구를 덮이는데 난방 에너지의 절반을 써온 셈이다. 난방 효율이 높지 않으니 보일러를 아무리 돌려도 추울 수밖에. 그러다 새로운 세입자들이 이사 왔고, 추위를 많이 탈 그네들이 올겨울 보일러를 열나게 때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작년 겨울 결로 현상 때문에 기승을 부리던 곰팡이도 올해는 무소식이다. 무엇보다 따뜻하게 잠을 푹 잘 수 있어서 살 것 같다. 세상에나... 어울려 산다는 게 이런 거였어?


당신 인생 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제일 먼저 톨스토이의 민화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오른다. 연민 때문에 차마 임무(인간의 목숨을 거두어들이는 일)를 완수하지 못한 천사 미하엘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 날개를 잃은 알몸으로 지상에 유배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구두 수선공이 된 미하엘이 인간 무리에 섞여 살면서 신이 던진 세 가지 물음의 해답을 찾아가는 종교적 우화다. 남편을 잃은 여인의 목숨을 거두러 지상에 내려왔던 천사 미하엘은 갓 태어난 여인의 아이를 보고 그 아이가 어미 없이 살지 못할 거라는 짐작했지만, 어미가 죽은 후 그 아이는 이웃 여인들의 동냥젖을 먹고 살아남아 하느님이 던진 질문의 답이 된다. 올겨울 최강 한파가 들이닥친 오늘 밤에도 쿵쿵거리는 소음(요리한다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듯)이 들린다. 괴롭지만 층간 소음을 내는 그 이방인들 덕분에 올겨울을 따뜻하게 나고 있다. 소음의 괴로움과 따뜻함의 행복 사이를 오가며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라는 삶의 지혜를 조용히 납득하는 겨울밤이다(졸리니 횡설수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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