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습성은 참으로 무섭다. 어떤 책은 꼭 그 페이지에서 손이 멈춘다. 오늘도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어김없이 그 페이지에 머물렀다 눈으로 한 번 마음으로 한 번 읽는다. '廢屋의 사람들은 그 물로 밥을 지어 일가를 이룬다'와 '나는 아무것도 건너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망설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두 문장 사이의 행간이 가슴에 가시처럼 걸린다. 오늘도 여지없다.
글은 그 사람을 닮는다. 안 그런 경우도 많다고 들었고 직접 겪기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믿음을 신앙처럼 품고 있다. (잠시였지만) PAPER 좌담 때 만나 본 시인은 그가 뱉어낸 시어보다 명랑하고 밝았다. 인상이 가벼웠다는 얘기는 아니다. 글의 무게가 몸과 말에도 옮겨붙어있다고, 단단하게 들러붙어있다고 느꼈다. 시인의 책방 이름, '위트'와 '시니컬'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던 사람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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到着
구름이 해를 가리고 마침내 비가 내리는, 이야기라기엔 비좁고 사연이라기엔 주어가 없이 가로지른 목책 아래 울음을 씻느라 뒤도 돌아보지 못하는 개울은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잠시 사라진다 廢屋의 사람들은 그 물로 밥을 지어 일가를 이룬다 이따금 휩쓸려 떠내려간 이도 있을 테지만, 지나간 일은 탄식도 비명도 내놓지 않는다 어떤 날은 그늘도 없이 일사에 시달리고 오한이 짚어주는 이마가 차가워 칭얼대는 어린아이와 마당을 비운 가족들과 짖지 않는 개처럼 왕래하지 않는 저녁과 밤 나는 아무것도 건너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망설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니 어디쯤에서 어딘가로 곧 도착할 것이다 이곳이 아닌, 좀더 숲에 가까운 창 쪽으로 몸을 붙인 옆자리 여자는 잠을 깨려들지 않는다 덮은 것도 없이
-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109쪽, 유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