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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란 무엇인가?

제93회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들에게 봉준호 감독이 물었다

by 타자 치는 snoopy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순간은 감독상 시상 장면이었다. 전년도 감독상 수상자 자격으로 올해 아카데미 감독상 시상을 하게 된 봉준호 감독이 후보에 오른 다섯 감독에게 재미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디렉팅이 뭔가? 감독이란 직업은 도대체 뭐 하는 직업인가? 저 자신도 감독이지만 사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개 난감합니다. 정색하고 얘기하기도 좀 쑥스럽고, 좀 오그라들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 질문 자체가 사실 짧고 명쾌하게 대답하기에는 좀 쉽지 않은 그런 질문입니다. 제가 인터뷰 중에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저는 뭐 슬쩍 얼버무리거나 또는 회피하거나 도망치거나 이럴 것 같은데, 오늘은 제가 그 질문을 했습니다. 감독상 후보에 오른 다섯 감독님들한테요.


"만일 길에서 어린아이를 붙잡고 감독이란 직업이 무엇인지, 20초 이내에 짧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질문을 보냈습니다. 다섯 후보 감독님들의 답변을 들어 보시죠. 상당히 개인적인 답변입니다.


토마스 빈터베르그(<어나더 라운드>)에게 디렉팅이란? 저 아래 시커먼 물이 출렁이는 절벽 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전혀 알 수가 없지만, 동료 아티스트들과 함께 다 같이 뛰어내린다면 어떤 뜨거운 연대감이 치솟아 오른다고 합니다.


리 아이작 정(<미나리>) 감독은 말합니다. 영화는 삶에 대한 응답이어야 합니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진정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 스토리 텔러는 늘 우리의 실재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규정짓는 껍데기를 벗겨 내고 타인 입장에서 보는 체험을 선사했던 클로이 자오(<노매드랜드>) 감독은 말합니다. 감독이란 결국 이것저것 웬만큼은 할 줄 알지만 뭔가 하나 제대로 마스터한 것은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일이 꼬여 가기 시작할 땐 <버든 오브 드림스> 같은 영화를 보면서 '아... 이런 상황에서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그런 존재입니다.


에머랄드 펜넬(<프라미싱 영 우먼>) 감독에게 디렉팅이란 잔혹 또는 무시무시한 것들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일입니다. 에머랄드 감독이 여덟 살 때 "너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고 엄마가 물었을 때, 꼬마 에머랄드는 대뜸 이렇게 답했습니다. "전 살인 사건 얘기를 좀 쓰고 싶어요."


그리고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를 찍은 데이빗 핀처(<맹크>) 감독은 말합니다. 어떤 하나의 씬을 찍을 때 그걸 찍는 수백 가지의 방법들이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딱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맞는 방법'과 '틀린 방법'.



https://www.youtube.com/watch?v=LXhe4EiMy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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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랜드>로 감독상을 수상한 클로이 자오 감독은 후보 감독 중 유일하게 영화 한 편을 언급하는데, 그녀가 말한 <버든 오브 드림스>(Burden Of Dreams, 1982)는 레스 블랑크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다. 클로이 자오에게 '영화 작업의 나침반'과 같은 이 다큐 영화는 베르너 헤어조크의 걸작 <피츠카랄도>의 탄생 과정을 담은 메이킹필름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한 천재 감독(베르너 헤어초크)이 남미의 정글 속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난관에 부딪쳤을 때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어떤 고뇌를 하고 어떻게 결단을 내리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클로이 자오는 <송스 마이 브라더스 토트 미>(인디언 공동체), <로데오 카우보이>(카우보이의 세계), <노매드랜드>(유목민으로서의 삶), 세 편의 영화를 통해 일찌감치 자기만의 개성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했는데, 그 세계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게 무너진 채 버무려져 있다. 영화가 묘사하는 풍경은 등장인물들의 실재 삶에 카메라가 스며든 듯한 느낌이다. 그녀는 중심에서 누락된 변방인(주변인)들의 세계를 다큐멘터리처럼 묘사하고 서술하는데,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극영화'의 건조한 까슬함이 영화의 표면이라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실적 판타지'의 풍경과 서사가 내면을 채우고 있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은 일찌감치 클로이 자오의 천재를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한다. 클로이 자오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는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작업 방식을 멘토 삼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외줄 타기 하듯 오가며 극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연출하는 방법을 체득한 것 같다. 그렇기에 '디렉팅이란 무엇인가?'라는 봉준호 감독의 질문에 답하며 베르너 헤어조크의 고민과 결단이 담긴 <버든 오브 드림스>를 언급한 게 아닐까... 그런 추측을 해본다.


다섯 감독의 답변은 모두 멋졌지만 그중 인상적이었던 답 두 가지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는 삶에 대한 응답이어야 합니다.”와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의 “어떤 하나의 씬을 찍는 방법은 딱 두 가지밖에 없다. '맞는 방법'과 '틀린 방법'.”이었다. 빈터베르크 감독님,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맹크>를 그렇게.... (이하 생략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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