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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

가족이라는 종교와 이민자들을 위한 동화

by 타자 치는 snoopy


영화 <미나리>를 보면서 떠올린 사람이 둘 있다. 아버지의 할머니(나에겐 증조할머니), 그리고 내 외할머니 김복희 여사. 평안남도 순천에서도 산골 깡촌에 살았던 할아버지는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살이에 하나라도 입을 덜 요량으로 아들 둘(내 아버지와 막내 삼촌)을 동생네 집에 맡겼다. 아버지는 그렇게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손자(내 아버지)를 몹시 예뻐하셨나 보다. 한 방에 끼고 자며 금이야 옥이야 하셨다는데, 정작 아버지는 <미나리> 속 데이빗(앨런 김)처럼 할머니를 싫어했다. 싫어하는 이유도 같았다. 나이 들고 쇠약해진 육신에서 나는 '할머니 냄새'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낮잠을 자던 할머니 몸에서 이들이 바글바글 기어 나오는 것(쥐 떼가 난파선을 버리고 바다로 뛰어드는 것처럼)을 보고 기겁을 한 아버지는 할머니가 무서워 그 길로 동네 뒷산으로 도망쳐서는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뒷산을 배회다고 했다. 어린 손자는 본능적으로 할머니 체취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는지도 모른다. 냄새는 다른 어떤 감각보다 오래 남아 기억 속에 짙은 무늬를 새긴다. 할머니 목숨이 촛불처럼 흔들렸던 밤이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소망은 예뻐하던 어린 손자를 안아보는 것이었나 보다. "성화야아, 할머니가 너 보고 싶다고 찾으신다아, 얼른 와서 할머니 얼굴 좀 봐아, 저녁 먹어야지이... " 아버지는 총동원된 식구들이 자신을 애타게 찾는 외침을 산언덕 숲 덤불에 숨어 밤새 들었다고 했다.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할머니는 끝내 먼 길을 떠났다. 아버지는 가끔, 할머니 몸에서 기어 나오던 이의 엑소더스(대탈출 행렬)와 그때 나던 할머니 몸 냄새를 어제 보고 맡은 것처럼 얘기하며, 할머니가 (처음 사별을 겪을) 손자의 충격과 슬픔을 덜어내기 위해 '정을 떼려고' 그랬던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곤 한다.


외할머니는 종종 딸(내 엄마)네 집에 놀러 와서 며칠씩 묶다 가곤 했다. 나는 외할머니가 오는 게 싫었다. 코를 심하게 고는 할머니와 같이 자는 게 싫었고, 할머니 몸에서 나는 구닥다리 장롱 서랍장 같은 냄새(정확히는 좀약 냄새)와 구시렁거리던 잔소리가 못내 듣기 싫어서였다. 그럴 때마다 '텔레비'는 할머니 차지가 됐고 우리는 입을 삐죽거리며 만화 영화나 '부리부리 박사' 같은 인형극 대신, 어른들이 잔뜩 나와 투닥거리는(그래서 어린 우리들에겐 하나도 재미없었던) 드라마를 봐야 했다. '텔레비'를 볼 때마다 할머니는 '염병', '썩을 년', '육실헐 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년'을 입에 달고 살았다. <미나리> 속 '순자' 윤여정도 외할머니의 애증이 얽힌 '썩을 년' 중 하나였다. 데이빗만큼 어렸던 나는, 그렇게 욕을 하면서 끝까지 드라마를 보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면 좋은 게 딱 하나 있었다. 할머니의 취미 생활은 누룽지 눌리기와 동네 사람들과 함께 가는 방송국 단체 견학이었다. 누룽지는 쌀이 많이 들어간다며 엄마가 표독스런 잔소리를 해댔지만, 할머니가 집에 와 있는 동안에는 맛있게 눌린 누룽지를 실컷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당뇨에 걸려 고생하던 말년엔 내가 간병을 하곤 했다. 볼 일을 볼 때마다 화장실에 모시고 가서 할머니가 당신의 밑을 추스르는 걸 도와주곤 했는데, 항문을 빠져나와 닭벼슬처럼 늘어진 치질 덩어리를 볼 때마다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매일 큰일을 보며 사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외할머니 하면, 지금도 '염병'과 '누룽지'가 떠오른다. 아! 브로콜리 돌기처럼 뽀글뽀글 볶곤 했던 '빠마약' 냄새도 함께.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순자가 손자를 '데이빗'이 아니라 "데이빗아"라고 부르고, "어이구, 내 새끼"라며 예뻐하다가도 "이놈의 새끼"라고 꾸짖는 장면에서 각자의 기억 속 할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아버지에겐 아버지의 할머니가 있고, 내게는 나의 외할머니가 있듯이.





배우 윤여정은 한국인의 집단 기억 속 '할머니'를 꾸미지 않고 그린다. 그녀는 운전면허 학원에서 체계적으로 운전하는 요령을 배운 연수생이 아니라, 면허도 없이 그저 먹고살기 위해 도로를 누벼 온 생계형 기사처럼 '순자'를 연기한다. 우리 눈엔 익숙한 모습이라 전혀 새로울 게 없는 한국 할머니의 모습이 이방인의 눈에는 꽤나 신선했던 모양이다. 나는 윤여정 씨 연기가 특별하게 대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연기에는 아침마다 출근 도장을 찍는 월급쟁이처럼 쇼치쿠 영화사로 출근해 또박 또박 영화를 찍었던 오즈나 나루세 감독의 근면함이 엿보인다. 연기는 '예술'이 아니고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이라는 투철한 프로 정신이 '순자'의 모습에 스며들어 있고, 쓴맛 단맛 다 본 인생의 경험이 자연인 윤여정의 또렷한 자의식과 함께 녹아 가족을 하나로 묶는 주춧돌 같은 캐릭터로 육화됐을 뿐이다. 현실 어디에나 있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개성적 할머니의 모습이 이민자들의 향수와 보편의 정서를 건드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스트롱 뽀이와 레슬링을 좋아하는 불량 할머니



영화 <미나리>에는 개인의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유리알처럼 빛난다. <미나리>의 반짝임은 화려하지 않지만 알맹이처럼 단단한 것에서 나온다. 정이삭 감독이 직접 겪은 유년의 뜰 속 기억의 이야기는 오랜 연마의 시간을 거쳐 아름답고 슬픈 이민자 가족의 플롯으로 재구성됐다. 주된 정서와 그 정서를 드러내는 방법 모두 너무 반듯하게 정련되어서 (예상을 벗어나는 지점 없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졌던 영화 <미나리>의 맛은, 그 우직하고 슴슴한 정서의 결 덕분에 이민자들(혹은 이방인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 보인다. 공감대는 종종 의외의 곳에서 싹튼다. 이민자들을 타지로 떠나보낸 모국의 사람들보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모습이 더 우리 자신의 실체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장벽을 넘어 메인스트림의 테두리 안으로 진입하려 몸부림치는 이민자 가족의 모습에서 인간 보편의 정서를 읽어내고 그 접점에 공감하는 것은 인간이란 동물이 가진 괜찮은 덕목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요즘 젊은 세대가 자신들이 한 번도 보고 겪은 적 없는 지나간 시대의 복고풍 문화에 열광하는 것처럼, 우리 눈엔 익숙한 모습들(화투, 회초리, 한약, 괴상한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손자 사랑)이 이방인들의 눈엔 한없이 새로웠을 것이다. 익숙함과 낯섦, 두 가지 극단의 정서가 환기하는 감정들이 묘한 접점에서 만나 <미나리>만의 개성적인 세계와 그에 따른 후폭풍(팬덤)을 구축한 것 같다.


<미나리>에는 굵직한 사건과 서사 대신, 쉽게 모습을 드러나지 않는 갈등과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사연만 가득하다.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과 엄마 모니카(한예리)의 현실적 갈등, 외할머니 순자와 손자 데이빗의 문화·세대 갈등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고난 앞에서 하나로 뭉치는 '가족 서사'로 봉합된다. 이질의 난관에 부딪친 가족들의 어긋나는 정착기는 윤여정의 '브로큰 잉글리시' 같다. 의도와 달리 자꾸만 어긋나는 삶의 아이러니는 송곳니를 숨긴 채 생활 곳곳에 지뢰처럼 묻혀 있다. 가족 구성원은 절뚝이다 때론 휘청거리지만, 그래도 각자의 방식으로 어제보다 조금씩 더 자란다. 이 '너무 착한' 성장기는 어린 데이빗에 국한된 서사가 아니다. 영화가 끝날 때쯤 눈에 띄게 성장한 존재는 데이빗이지만, 어린 아들 못지않게 제이콥과 모니카 역시 한층 성숙해진다. 그 변화의 중심에 (남자 팬티를 입은 채 손자에게 고스톱을 가르치고, 교회 헌금을 슬쩍 훔치는) 괴상한 할머니의 대속(代贖)과 사랑이 있다.


사실주의 터치로 전개되던 <미나리>의 서사가 레코드판이 튀듯 갑자기 도드라지는 대목이 있다. 야뇨증을 앓고 있고 심장이 좋지 않은 손자 데이빗이, 잠자리에 들기 전 엄마가 시킨 대로 천당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자신은 천당이 무섭고 아직 죽기 싫다고 할머니에게 말한다. 순자는 "할머니가 너 죽게 안 놔둬. 누가 감히 우리 손자를 무섭게 해. 할미가 가만 안 놔둬."라며 데이빗을 달랜다. 그날 밤 데이빗은 처음으로 자신의 곁을 내주고 할머니 품에 안겨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데이빗은 이불 위 오줌 자국을 보고 자기가 자면서 또 오줌을 눈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오줌은 할머니 순자의 것이었다. 미나리를 심은 개울가에 나타난 뱀을 보고 했던 순자의 말("데이빗아,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더 나은 거야. 숨어 있는 거가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거란다.")은 이후 서사의 중요한 복선이 된다. 순자가 갑자기 풍을 맞은(뇌졸중) 상황을 기점으로 영화의 종교적 색채는 짙어진다. 갑작스레 그녀를 덮친 뇌졸중은 손자 데이빗의 심장병과 맞바꾼 대속(代贖)의 통과제의 같아 보인다. 이 비합리의 우연은 영화의 결말, 죄책감에 사로잡혀 방황하는 할머니를 붙잡기 위한 손자 데이빗의 달리기(데이빗은 심장이 약해 뛸 수 없는 아이였다)로 결실을 맺는다. 영화 <시>에서 미자(윤정희)가 악행을 저지른 손자의 죄를 고발하고 피해자의 넋을 위로하는 시를 씀으로써 손자의 죄를 대속하며 사라졌듯, 순자는 데이빗에게 닥친 죽음의 징후를 가로막고 자신이 대신 죽음의 그림자를 덮어씀으로써 가족의 미래(손자의 건강)를 구하고 그네들을 결속시킨 후 홀연히 사라진다. 주일마다 십자가를 끌며 '이것이 나의 교회'라던 폴(윌 패튼)의 기행(악령을 쫓아 작물의 풍작을 기원함)과 '다우징'이란 심령막대로 수맥을 찾는 아칸소 지역의 농작 문화는 한국의 '미신'과 닮아 있다. 아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며 '아메리칸 드림'의 합리와 효용을 좆던 제이콥(스티븐 연)은 화재로 곡물 창고를 잃는 수난과 아들 데이빗의 심장이 낫는 기적을 겪으며 '자기만의 닫힌 세계'를 버리고 이민 사회에 스며들기 위해 변화를 선택한다. 데이빗의 심장이 나아질 것이라던 순자의 믿음은 새로운 이웃을 믿고 주류 사회에 다가가려는 제이콥의 열린 마음으로 전염된다. 데이빗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순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시련을 함께 겪은 후 마룻바닥에 누워 서로를 부둥켜안고 잠든 모습을 통해 '가족'이라는 이름의 '종교'를 완성한다.






첫해 생산한 작물은 수확하지 않고 땅에 버려져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고 한다. 이민 1세대 삶의 목적은 자신들의 희생이 다음 세대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주춧돌(영화의 마지막 장면, 물이 있는 곳에 제이콥이 내려놓은 돌과 같은)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뿌리내리기 위해 겪어야 하는 갈등은 이민자들의 피치 못할 통과제의다. 꿈을 찾아 바다를 건넌 이들이 무얼 위해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척박한 현실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순간에, 인간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된다. 의지나 노력만으로 채울 수 없던 빈자리에 한국적 샤먼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접목해 만들어진 '이민자들만의 새로운 믿음'이 들어앉는다. 아칸소 들판 한구석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흐드러진 미나리는 할머니 순자가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과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됐을 것이다. 한인 이민 가족의 미국 정착기를 통해 서부시대 개척사(이민사)의 신화를 창의적으로 재현한 정이삭 감독은 <미나리>라는 '씻김굿'으로 이민 1새대의 희생을 진혼하고 추모하며, 이민 2세대인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기 위해 가족의 이민사를 영화라는 판타지의 형식을 빌어 신화로 기록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다음 세대의 밑거름이 돼 산화(散花) 한 할머니의 모습 대신 작은 개울가 옆 둔덕에 흐드러진 미나리 밭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삶은 결국 자기가 디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주변 공기에 스며들어 버티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듯이, 미나리는 이역만리 타국 땅에 잘도 흐드러져 자란다.


뾰족하게 날 선 유머가, 그러나 누군가를 욕보이고 헤치지 않을 만큼 따뜻한 페이소스가, 그녀가 전설이 된 화석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싱싱하게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증거한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자연인 윤여정은 아마도 할리우드나 아카데미 트로피보다, 좋아하는 와인을 마시고 '지풍년' 멤버들과 실컷 수다를 떨며 깔깔대는 일상의 행복을 선택할 것 같다. 그녀의 시크한 수상 소감처럼 '아카데미상 받았다고 윤여정이 김여정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마음껏 축하해 주고 싶다. <미나리>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은 윤여정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윤여정'이란 이름의 '미나리'가 편견의 벽 앞에서 좌절하던 아웃사이더들의 선두 주자가 되어 거둔 중요한 시대적 성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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