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꼴의 마음으로 산티아고의 오디세이를 노래하다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날까? 이자람이라는 소리통에서 노인의, 소녀의, 바다의, 생명의 온갖 소리가 신디사이저 사운드처럼 터져 나왔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장관이었다. 이자람의 소리는 잘 벼린 기계 같았다. F1 머신(레이싱카)이 모나코의 도심 트랙을 날렵하게 질주하듯, 브레이크와 엑셀 페달을 언제, 얼마큼 밟아야 할 지 정확하게 알고 실행하는 드라이버처럼 소리를 밀고 당겼다. 때론 야수의 포효로 으르렁대고 때론 파랑새의 휘파람처럼 속살거렸다. 소리를 갖고 놀고, 관객을 갖고 놀고, 이야기의 숨과 객석의 멱살을 쥐락펴락했다. 코로나 시국에도 어울림극장 객석을 가득 채운 검은 머리 관객들(판소리가 낯설지 않은 흰머리 관객보다 젊은 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이 ‘얼쑤!, 좋다, 잘한다아~!’... 연신 신명나는 추임새를 넣는 공연장 열기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를 관람하던 나는 이 기이한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기분 좋은 당혹감에 빠졌다.
이자람은 하나의 (불가해한) 현상이었다.
이자람의 소리는 활어처럼 펄떡댄다. 바다에 나간 지 85일째, 84일을 '공친' 늙은 노동자가 거대한 청새치 한 마리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며 '뺑이치는' 이야기가 이자람의 소리를 타고 관객들 머릿속을 휘젓고 다닌다. 굳은살 박인 성대가 힘줄이 팽팽한 날것의 창(노래)을 능숙하게 쏟아낼 때, 휘모리로 달려가는 이자람의 소리는 사력을 다해 청새치 잡이에 나선 늙은 어부의 육체노동에 속절없이 빙의한다. 고수의 장단은 흥겹게 담백하고, 이자람의 아니리는 올곧게 능글맞다. 무대 위의 2시간, 이자람은 소리를 뽐내는 광대가 아니라 쿠바 어촌 노인의 고단한 육체노동에 감정을 갈아 넣고 자기를 쏟아붓는 순결한 노동자가 된다. 판소리에 대한 이자람의 실존적 넋두리("나는 왜 판소리를 할까? 이 힘든 걸 왜 계속할까?")는 <노인과 바다>의 아니리에 섞여 들어 어부 산티아고의 피비린내 나게 고독한 노동의 소명의식과 하나로 포개진다. 객석의 공감은 불가능한 성취의 드라마(청새치 잡이)보다 고기 잡이 노동의 과정을 공유하는 즐거움과 삶의 질곡(상어떼의 습격과 빈손 귀환)의 순간에 발현된다. "판소리는 참 대단해. 어울림 극장 무대가 너무 커서 걱정했는데, 소리꾼과 고수의 상상력에 500여 명 관객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니 무대를 가득 채우고 넘치는구나." 이자람이 잠시 마른 목을 축이며 고수와 능청스레 주고받던 이야기의 여운은 깊고 길었다. 상상력의 힘을 믿는 이야기(꾼)의 숙명은 고되고, 질기고, 힘이 셌다. 동시대 관객으로 창작 판소리라는 미증유(未曾有)의 길을 가는 이자람의 다음 여정을 함께 하는 일이 한없이 설레고 즐겁다.
* 뱀발 : 15분의 인터미션 후에 “정어리 회 떠먹는 얘기를 하자니 객석의 ‘비건’ 여러분께 미안하다.”라는 사과로 동시대 관객의 공감대를 건드리는 이자람의 너스레는 센스가 넘쳤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소리꾼 이자람과 박지혜 연출가, 그리고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망망대해 위에서 그토록 먹고 싶어 했던 '모로스 이 크리스티아누스 (Moros Y Cristianos)'의 맛이 못내 궁금했다. 멋진 공연을 보여 준 유희 씨는 어울림 극장 공간이 판소리 공연을 하기에 너무 크다는 점과(판소리는 소리꾼의 숨소리와 표정을 관객이 함께 호흡할 수 있을 만큼 밀접한 거리감이 중요하다), 극 상황에 맞게 무대를 연출했다면 극적 효과와 감동이 더 컸을 거라며 단조로운(혹은 의도적으로 단순화 한) 무대 연출을 아쉬워했다. 만약, PAPER에서 소리꾼 이자람을 인터뷰하게 된다면, 1) 왜 지구 반대편 쿠바 어부의 <노인과 바다>를 창작 판소리 텍스트로 선택했는가?, 2) 헤밍웨이의 소설 속 소년 마놀린(친구이자 제자)을 왜 소녀 니꼴로 바꾸었는가?, 3) 각색과 작창(作唱) 과정에서 조 디마지오와 야구 얘기를 뺀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 가지를 꼭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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