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마누라와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공항선을 타고 가는 동안에도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까맣게 모른 채.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집사람이 고른 덮밥집에 도착했다.
재료 소진, 영업 종료.
아뿔싸! 오후 2시인데?
그때, 번뜩 생각난 근처 경양식집.
다행히 그곳엔 브레이크 타임이 없었다.
걸어가는 길에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아닐까?
식당에 도착했다.
다행히 한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몇 번 본, 그러나 내가 먼저 아는 척하기엔
조금 어려운
그런 커플이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상대는 내 마스크 쓴 얼굴을 몰라봤다.
짧은 순간, 말을 걸까 말까 몇십 번의 진동.
다정한 그네들 대화에 차마 끼어들지 못했다.
잠시 후 그 커플이 나가고
주문한 우리 음식이 나왔다.
상황을 모르는 마누라에게
신기하다고 그 얘길 해주면서 밥을 먹고 있는데,
식당 창쪽을 보던 마누라가 깜짝 놀라며
"어!? 저분, L 양 아냐?"
에이 설마... 이런 기막힌 우연이 연달아 겹친다고?
혹시 몰라 급히 밖으로 나가 봤더니
마누라 눈썰미는 정확했다.
어머님과 함께 저만치 걸어가는 익숙한 뒷모습.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인사를 넙죽 건넸다.
몇 번의 눈 깜빡임 그리고 몇 초 간의 포즈.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는 그분 얼굴이
10년 전 그대로인 모습에 오버랩되면서
되레 내가 놀랐다.
세상에... ! 10년 만에 우연히
길바닥에서 이렇게...
나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 삶의 우연성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 좋아하는 넥타이의 색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죽었다 깨나도.
운명이나 우연을 믿지 않던 썸머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깨닫게 된다.
그냥 그렇게 됐다는 것(It just happened)을.
어느 날 식당에 앉아서 <도리언 그레이>를 읽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책에 대해 물어보는 거야
그 사람이 내 남편이야
내가 영화를 보러 갔다면?
내가 점심을 다른 데서 먹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거기에 1분 늦게 도착했다면?
그건 운명이었어
(영화 <500일의 썸머> 중)
우리가 조금 늦게 서울행 공항철도를 탔다면?
첫 번째 들른 식당에서 덮밥을 먹었다면?
밥을 먹느라 지나가는 L 양을 보지 못했다면?...
무수한 '만약 그랬다면'을 뚫고
벌어지지 않았을 만남을
간발의 차이로 겪고야 말았다.
삶은 상수와 변수로 가득 찬 방정식 같다.
절대, 결괏값을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여러 갈래 길 위에서 잠깐이라도 마주친 당신은,
무수한 당신들과 나의 인연은,
그래서 소중하다.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변수이니까.
#상수와변수 #우주의기운이모여야가능한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