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 하면 배창호 감독의 영화 <개그맨>의 첫 장면이 생각난다. 나른한 오후, 재즈 곡 '썸머타임'이 흐르는 이발소. 이발소 주인 문도석(배창호)은 "여름엔 개고기가 최고"라며 가죽 띠에 면도 칼을 벼리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얼굴을 반쯤 덮은 3류 카바레 개그맨 이종세(안성기)가 이발소 의자와 한 몸이 돼 졸고 있는 장면.
머리를 잘랐(이 관용구는 쓸 때마다 무섭)다. 오랜만이다. 셈을 해보니 3개월에 한 번씩, 1년에 4번쯤 커트를 한다. 3 X 4 = 12. 1년의 사이클에 딱 떨어지는 아름다운 수식이다. 머리를 한 번 자를 때마다 한 계절과 이별했고 10년에 40번쯤 이발을 한 셈이니, 살면서 200번쯤 누군가에게 내 머리를 맡긴 셈이다.
비록, 머리카락뿐이지만 '누군가에게 온전히 나를 맡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대 배치받은 후 첫 휴일 개인 정비 시간, 바리깡과 가위로 내 머리를 정비(?)하던 내무반 고참(그땐 이발병이 따로 없었다. 아무나 가위 쥔 놈이 이발병)이 가위로 내 귀 끝을 예쁘게 오려냈던 일이 있었으니까. 나는 '나'를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나를 맡기는 일을 몹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름이 끊기는 게 끔찍해서' 술 마시는 게 싫고, 위장 내시경과 대장 내시경까지 마취 없이 쌩으로 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솜씨 좋은 헤어디자이너(이발사)가 가볍고 잰 손놀림으로 내 머리카락을 잘라 주면 앉은 채 어김없이 꾸벅꾸벅 졸고 만다. 그렇게 솜씨 좋은 이발사를 평생 두 명밖에 못 만났다는 게 비극이지만.
겁도 많고 의심도 많은 인간인지라 남을 쉽게 못 믿어 그런가 싶지만, 사람은 또 잘 믿는 편이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는 일은 쉽지 않다. 남들은 좋아 죽는 안마 같은 건 죽어도 못 받을 것 같다. 가만 생각해 보니, 살면서 나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딱 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와 내 곁에 있는 마누라. 미안한 얘기지만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나를 풀어헤쳐 내려놓고 나를 맡길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뭘까? 왜 그런 걸까? 미안함 때문인가? 아니면 미덥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런 놈이 단골 미용사에게 내 머리를 맡길 땐 잘도 편하게 퍼질러 존다. 미스터리다, 미스터리. ㅎㅎ
말로 풀어 설명할 순 없지만, 엄마나 마누라에게 나를 맡길 수 있는 건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마음이 편한 존재이기 때문인 듯하다. 철석같이 그네들을 믿는다거나, 숭고한 사랑과 신뢰 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 풀어진 몸이나 망가진 형편과 마음을 다 까발려 보여도 하나도 미안하거나 민망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을 농밀하게 보내면서 닳고 닳은 관계가 된 이들이라 그런 게 아닐까?... 오늘도 비몽사몽 졸며 되도 않는 잡생각을 하는 사이, 머리 정비가 깔끔하게 끝났다. 손으로 내 풀어진 몸을 받아주신 미용실 한 실장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앞으로 내 머리를 몇 번을 더 이분들에게 맡겨야 하는 걸까 셈해 보았다. 까마득한 시간 같기도 하고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듯 금세 끝날 것 같기도 한 숫자가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한 80번쯤 더 겪으면 이 모험(남에게 나를 맡기는 건 영원한 모험이다)도 끝이 나게 되는 걸까? 해보면 알겠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