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이 생명이다
두 개의 이름은 두 개의 세계다. '치히로'였던 소녀가 마녀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센'이 되었다. 마녀는 '작명'을 통해 인간을 지배/소유하고, 그녀는 다른 이름을 얻음으로써 다른 세계의 자장권에 편입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치히로'였다가 '센'이 된 소녀가 '치히로'란 이름을 잊지 않고 자기 본성을 찾아 회귀하는 성장서사 영화(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는 만화가 아니다, 영화)다. 마녀 유바바의 표현을 빌면 "800만 신들이 피로를 풀러 오는 온천탕"에 떨어진 이 동양의 '엘리스'는 '자기'를 잊은 소년 '하쿠'의 도움으로 온천탕 보일러실의 '가마솥 할아범'을 찾아간다. 세 쌍의 팔을 쉴새없이 놀리며 하루 종일 노동 착취를 당하는 가마솥 할아범은 보일러실의 터줏대감이다. 그는 숯검댕이 꼬마 요정들을 닥달해 온천물을 데우고 있다. 그 비현실적인 공간에 치히로가 들어서는 순간 프레임 안의 미장센 중에서 내 눈에 가장 강렬하게 꽂힌 것은 노란 주전자의 물성이었다. 1980년대 중학교 교실에나 있을 법한 커다랗고 노란 주전자는 일순, 이 비현실적인 공간의 판타지에 실체적 개연성을 불어 넣고, 그 덕분에 붕 떠있던 귀신들의 세계가 단단한 구체성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그 노란 주전자의 손잡이를 쥔 가마솥 할아범이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순간, 보일러실의 이미지들은 구체성을 획득하고 '진짜'가 된다.
소설이라면 대충(언어의 본질이 추상적이란 의미로) 묘사할 수 있지만, 영화의 세계에선 불가능하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철저하게 구체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고증이 필요한 영화 <암살> 제작에 "샹들리에 1개에 5000만원, 링컨 케이 등 클래식 자동차 구매/대여에 4억원 등 세트와 의상에만 35억원을 투입했"다는 하소연(김성민 프로듀서, 한겨레, 7월 23일)과 함께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는 순제작비만 100억대가 넘을 거란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일 게다. 영화화는 추상적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략적 디테일은 놀랍도록 빛난다. 늪으로 가는 혼령들의 기차 회수권 장면처럼, 영화 내내 하야오의 치밀한 기지는 빛을 발한다.
지난 주에 본 이웃의 글 중에 잭 매니건의 책 <고전의 유혹> 중 한 구절의 손글씨 메모가 생각난다. (댓글도 달 수 없고 서로이웃공개 글이라 인용을 허락받진 못했다. 양해를....) 옮긴다. "나는 늘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생각이란 고요한 연못 표면의 충격과 같다고 말한다. 처음에 그것은 수면을 뚫고, 반향을 일으키고 또 반향을 일으킨다. 주제를 신중하게 선택하라. 바늘로 물을 찔러보라. 콘크리트 블록을 던지지 마라. 그리고 충분하다고 생각됐을 때 결정하라. 반드시 목표를 시야 안에 두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일시적인 목표라 해도 말이다. 그러면 그 목표는 거의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나 많은 것을 신경 쓴 나머지 결국 완수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파멸 그 자체이다." 전체적 구도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 글을 나는 "디테일이 생명이다.",라고 읽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기가 창조한 세계(귀신들의 온천탕)에 콘크리트 블록을 던진 게 아니라 바늘로 물을 찌르듯 접근해 갔다. 그 접근법의 중심에 노란 주전자가 있다. 노란 주전자는 '헛것의 세계'를 '진짜의 세계'로 불러온다. 노란 주전자를 보는 순간, 치히로도 관객들도 이 낯선 세계가 우리가 익히 알던 그곳과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챈다. 그리고 영화는 완벽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우리(치히로와 관객들)를 귀신들의 세계로 인도한다. 진정한 판타지는 그렇게 노란 주전자로 시작해 기차 회수권으로 끝이 난다. 앞으로의 내 글(영화 리뷰)도, '바늘로 물을 찌르듯' 노란 주전자처럼 쓸 예정이다.
by 타자 치는 스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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