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7일 화요일.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되돌아온 날이었다. 폴란드 여정의 말미를 향해 아쉬운 발걸음을 머뭇거리던 중이었다. 우리는 지쳤고 느슨해졌고 집에 가기 싫었다. 여행 초반, 꿈처럼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빛의 속도로 사라져 가던 순간이었다. 황금빛 살진 햇살이 다시 찾은 바르샤바를 온통 끌어안고 있던 오후였다. 지하 역사에서 지상으로 올라서자 (고작 며칠 머물렀을 뿐인데) 익숙한 거리 풍경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숙소로 가서 짐을 풀기로 하고 발걸음을 떼려는데 쏟아지는 햇살 맞은편에서 누군가 우리를 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저 사람 왜 우릴 보고 실실 웃지?' 궁금증에 물음표를 달기도 전에 동양인 남자가 가슴에 안고 있는 책 한 권의 제목이 눈에 박혔다. 큼지막한 한글로 쓴 <동유럽>. 우리는 번개처럼 눈이 마주쳤고 '그래, 당신 마음 다 알아' 하는 느낌으로 싱긋 웃으며 서로를 스쳐 지나쳤다. 그 짧은 찰나에 무수한 대화가 오고 간 듯 느껴졌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막 바르샤바에 도착한 듯 보이는 그 남자는 폴란드 여행에 대한 기대로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불현듯 그이의 부푼 설렘과 기대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를 찾아 들고 뒤늦게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막 이국땅에 첫발을 내디딘 듯 보이는 뽀송한 여행객은 눈부신 햇살의 인파 속으로 종종걸음쳐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 석양이 짙게 깔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에 본 바르샤바는 첫날 본 바르샤바와 다른 모습이었다. 집에 온 듯 익숙하면서 처음 보는 듯 낯설었다. 누군가 새롭게 시작하는 바르샤바의 하늘 아래 부풀었던 희망과 기대가 차분하게 까부라진 우리가 함께 있었다. 이제 막 도착한 여행객은 뜀박질하며 자신의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고,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할 우리는 오래된 연인의 얼굴을 마주하듯 현실을 직시하기 직전의 아찔함으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있었다. 그 엇갈림 속에서 시작과 끝이 한 데 뒤엉킨 모습을 보았다. 누군가의 시작은 누군가의 끝에서 이어지고, 인생의 끝과 시작은 서로 꼬리를 물고 맞물려 있다는 것을,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씨앗처럼 품고 있다는 것을.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다시 새로운 사랑이 싹 트는 것처럼.
언젠가 우리는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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