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종이의 지독한 연애담
(<PAPER> 2020년 가을호 '맨발의 영화' 원고입니다.)
덧 : 점심시간을 이용해 사무실 근처 서점을 산책한다. 서가에 꽂힌 책등을 쓰다듬을 때 종이의 감촉과 소리가 에로틱하게 느껴진다. 책은 겉과 속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책-종이-가위>를 보았다. 일본의 책 장정 장인 기구치 노부요시에 대한 다큐였다. 영화를 본 후 기구치 씨가 장정한 책을 갖고 싶어 아마존 재팬을 뒤졌다. 모리스 블랑쇼의 책이 4,950엔.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내내 아쉬워했다. PAPER 좌담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밤, "어떤 서점을 하고 싶냐"던 편집장님 질문에 “환경과 페미니즘 전문 서점을 열고 싶어요.”라고 대답하지 못한 걸 후회했던 것처럼. 영화 <일라이> 속에서 책은 무너진 세계의 구원이다. 책을 펼칠 때마다 내 안에서 종이의 물성이 작가의 영혼과 한 데 버무려지기를 기원한다. 언젠가는 내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2017년 8월 시드니에 갔을 때 일이다. 블루마운틴으로 가는 길목, 카툼바 역에 도착했다. 급히 공중화장실을 찾아야 했다. 근처 호텔로 뛰어가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가 로비에서 쫓겨났다. 노상 방뇨라도 해야 할 판이라 눈앞이 아찔해졌는데 돌아 나오던 언덕에서 카툼바 도서관을 만났다. 우연이 아니었다면 스쳐 지나갔을 그곳은 따스한 질감의 나무 책장 가득 책을 품고 있었다. 급한 용무 덕분에 우연히 들르게 된 이국의 도서관은 구석구석 아름다웠다.
가을맞이 PAPER 좌담 주제가 '책의 집'이란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 <카툼바 도서관>이었다. 책의 집을 서점, 도서관, 출판사, 혹은 각자의 정리 안 된 책장이나 책을 읽은 이의 마음속이라고 정의한다면, 처가에 갈 때마다 들르는 낙성대 헌책방 <흙서점>과 프레더릭 와이즈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뉴욕 라이브러리>를 통해 알게 된 <뉴욕 공립도서관> 그리고 아무도 만든 적 없는 새로운 개념의 책을 한 땀 한 땀 손으로 묶어내는 출판사 <닻프레스(Datz press)> 등이 책의 보금자리로 어울리는 곳이라 생각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났던 다큐멘터리 <책-종이-가위>도 마찬가지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상영 목록에서 제목을 보자마자 무턱대고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가을, 부산국제영화제 취재에 나선 PAPER 편집부 식구들 모두와 함께 보고 싶었지만 결국 나 혼자 <책-종이-가위>를 관람했다. 화면 속 책의 질감을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의 이 영화는 하나의 그릇이 되어 우직하면서 섬세한 장인의 손길과 시선으로 또 다른 장인이 만든 책의 육신과 영혼을 24프레임의 시공간 안에 담아냈다.
책 디자이너였던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책 장정(裝幀)의 세계에 매료됐던 히로세 나나코 감독은 기쿠치 노부요시 장인이 쓴 책 <장정 이야기>를 읽고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고 한다. 기쿠치 노부요시는 평생 수작업만으로 15,000여 권의 책 표지를 만들어 온 책 장정의 장인이다. 감독은 늙은 장인의 작업실에 카메라와 함께 스며들거나 때론 냉정한 거리를 확보하면서 3년을 동고동락한다.
디지털 방식이 지배하는 최첨단 기술의 시대에도 장인의 두 손에 들린 도구는 오직 종이와 가위뿐이다. 기쿠치 씨는 종이를 구기고 손으로 비비고 얼굴에 대고 문지른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겉표지 종이의 색감과 질감, 띠지의 크기와 모양, 폰트 한 글자 한 글자의 위치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한다. 책 표지는 책 본문의 내용으로부터 태어난다. 장인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관념과 언어에 종이로 만든 뼈와 살을 붙이고 옷을 입힌다. 사각거리며 가위로 종이를 자르는 소리나 부드러운 손길로 책등을 쓰다듬는 장면에서 종이 질감이 느껴지는 사운드는 제법 육감적이다. 책 디자이너는 언어의 집을 짓는 목수와 같다. 맞춤한 종이의 질감과 모양이 문자를 감싸 드러내면 비로소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글이 몸(집)을 얻는다. 속과 겉, 둘 사이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책의 안쪽(본질)을 끄집어내어 손에 잡히는 실체로 표현하는 것이 책 장정 장인의 소명이다. 책의 집이 완성될 때마다 두 세계의 장인은 치열하게 책을 만드는 공정과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이 이란성쌍둥이처럼 닮았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그러면서 <책-종이-가위>는 '종이책에 바치는 연서(戀書)' 같은 영화가 된다.
영화 상영 후 GV 시간에 질문을 했다. “독서 행위와 종이책이 조금씩 소멸의 길을 걷고 있는 디지털 기술의 시대, 당신의 영화로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인가요? 전자책의 시대에도 종이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히로세 감독의 답변은 조용하면서도 단호했다. “종이책만이 책이라고 고집하지는 않겠지만, '책 표지는 글의 몸'이라는 기쿠치 노부요시의 말처럼 작가의 글과 뜻을 종이의 질감을 통해 느끼는 책 읽기는 몹시 중요한 의미가 있고 전자책으로는 절대 그런 농밀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혹여 짝사랑에 그치게 될지라도 실체가 없는 언어가 책의 장정을 통해 글의 육체를 얻는 것처럼, 기쿠치 노부요시의 표지 디자인과 그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책의 이야기들이 히로세 나나코의 카메라를 만나 이미지와 이야기의 단단한 물성을 획득한 것이 아닐까? '책을 읽고 수수께끼를 만나고 시간을 들여 흡수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라는 히로세 감독의 말에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기술과 정서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책은 종이 뭉치 이상의 '그 무엇'이다. 종이책의 미래와 책의 효용성에 대해 굳건했던 믿음이 흔들리고 있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오래된 시간의 온기를 머금은 책의 냄새,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사각거리는 종이의 질감, '이야기의 집' 혹은 '인류 지혜의 보고'로서의 책의 역할과 사명을 굳게 사랑한다. 시시각각 무섭게 바뀌는 이 세계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더듬어 본다. 삶의 방식이 변하고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이 넘쳐나는 가운데 출판 시장은 불황에 허덕이고 있고 전자책의 미래 역시 안개 속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지적처럼 ‘현재의 결핍은 결점이 아니라 가능성이 될 수 있다’라는 믿음을 보듬어 본다. 책의 집을 지어주려는 이들의 애정과 노력 덕분에 여전히 책은 살아 있고 쉽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끈질긴 희망 말이다. 책의 집은 서점, 도서관, 출판사, 누군가의 책장처럼 유형의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책은 그 책을 읽는 독자의 기억 속에 가장 튼튼하고 안락한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않을까?
By 타자 치는 sno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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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wPpiBIChp0w
https://www.youtube.com/watch?v=v7yewHHY7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