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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Mar 31. 2019

우간다 국민첫사랑에서 '폐하'가 된 사연

드라마 '대조영'이 우간다 사람들에게 알려준 감사 인사하는 법

드디어 기관에 조금의 보탬이 되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한 달 정도 걸려 턱없이 부족했던 체육 용품을 구매했습니다. 코이카에 활동물품비로 예산을 신청해 승인받고, 그 예산을 집행해 공, 콘, 팀 조끼, 휘슬, 충전식 앰프 등을 샀습니다. 다른 봉사단원들이라면 쉽게 해낼 일인데, 저는 어렵사리 해냈습니다. 

기존에 있던 용품들. 농기구 아니고 체육 용품입니다(2019.02)

우간다는 영국 식민지였던 까닭에 영국에서 대중적인 스포츠를 주로 즐깁니다. 이곳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노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나라가 스포츠 분야에서도 얼마나 미제화되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름부터 생소한 럭비, 넷볼, 크리켓을 주로 즐기는데 축구라도 없었으면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수업하기 좋은 종목들에 필요한 용품을 살지, 이들이 주로 즐기는 용품을 살지 고민했습니다. 두 가지 선택지 모두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전자는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이들에겐 새로운 스포츠 종목을 소개하는 것이 될 테고, 후자는 제가 떠나더라도 이들이 계속적으로 용품을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작가 소개에서도 철저히 아프리카 편이라고 천명했으니,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교장과 제 코워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고, 제 수업에 필요한 것들과 함께 구매를 확정했습니다.


1년 봉사단원이 가용할 수 있는 활동물품비는 1500달러인데 저는 절반 정도를 썼습니다. 코이카 해외봉사단원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활동물품 지원은 봉사단원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일 중 하나입니다. 금액 규모도 작고 행정 절차도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이죠. 대부분 쉽게 해낼 일이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산을 집행하려면 미리 가격을 조사하고, 인보이스를 첨부해 예산 신청 보고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하지만 격식 없이 연습장을 찢어 인보이스를 적어주는 가게가 대부분인 것이 이곳 우간다의 매력입니다. 진자 지역에서 가장 큰 체육사에 갔음에도 인보이스인지 학생 연습장인지 분간이 안 되는 서류를 받았습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써준 연습장을 토대로 제가 인보이스를 다시 만들어 출력했습니다. 체육사에 한 번 더 가서 서명을 받아야 한 건 덤이고요. 이때까진 돌고 돌았지만 순조로웠다고 자평했습니다.

오른쪽이 날 것 그 자체의 인보이스. 정말 연습장을 찢어주지만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이 프로(2019.03)

하지만 우간다에선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활동물품비 신청을 위해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정전으로 인해 제 노트북 충전기가 고장 난 것입니다. 배터리도 없어서 노트북 전원을 켤 수 없는 상황에 절망하고 있을 때, 교장 선생님 앞에서 체육 용품을 사 오겠다고 이야기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제 말이 혹여나 그에게 호언장담처럼 느껴졌을까 봐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단원으로 오기 전 숱하게 받은 교육 내용 중 하나가, '현지인과 절대 확약하지 마라'였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이번 달 활동물품 신청 못하면 허풍쟁이로 전락할 것만 같은 걱정에 우간다 PC방으로 달려갔습니다.

너무 급해서 내부 컴퓨터 사진을 못 찍었습니다. 한 시간에 600원 정도(2019.02)

이곳에도 PC 카페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계약할 때 이 PC 카페에서 집주인과 계약서를 출력했던 탓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인터넷도 꽤 빠릅니다. 워드나 엑셀은 기본이고 어도비 포토샵과 일러스트도 정품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제게 필요한 프로그램은 단 하나, 바로 '한글'이었습니다. 한글 프로그램은커녕 한글 자판도 없는 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영어로 견적서를 쓰고 코디네이터에게 귀여운 이메일을 남겼습니다. 본의 아니게 활동물품비 예산 신청할 때 코디네이터에게 제 보고서를 거의 떠넘기다시피 한 셈이죠(다행히 며칠 뒤 집에 가는 길에 전기 고물상을 발견해 충전기 수리를 맡겼고 그 수리공이 보기 좋게 해낸 덕분에 노트북으로 정산 보고서는 잘 쓸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감사합니다는 한글 수호를 위한 마지막 자존심(2019.03)

예산을 승인받아 체육 용품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체육용품을 사 온다고 하니 교장 선생님이 흔쾌히 학교에 있는 차량을 이용해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덕분에 용품을 구매해 운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기사 분께서 영어를 못하고 루소가만 할 수 있는 탓에 루소가만 쓸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고요. 


인보이스를 받고 한 달만에 체육사에 가니 그곳에 있던 직원들이 저를 미친 듯이 반겨줬습니다. 몇 번 지나다니는 건 봤는데 왜 안 오나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며, 지나치게 환대해줬습니다. 환대에 응답하기 위해 저는 인보이스로 받은 용품을 모두 구매했습니다. 이것저것 담아줄 때 그들의 표정이 유독 해맑아 보여서 좋았습니다. 이들이 직접 차로 실어주기까지 했습니다. 다음에 제가 개인적으로 뭔가 사러 오면 꼭 많이 할인해주겠다며 저를 배웅해줬습니다. 

큰 손에게 특별히 친절한 체육사 직원 분들(2019.03)
사람 실은 거 아니고 체육 용품 실은 겁니다(2019.03)

충전식 앰프까지 실고 학교에 도착하니 기사 분께서 체육 창고가 아닌 다른 곳에 짐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런가 봤더니, 학교에 들어오고 나가는 물건은 무조건 저 장소를 거쳐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마담 한 분이 앉아서 제가 사 온 용품들을 체크했습니다. 이내 제 코워커 다니엘도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용품들을 보더니 너무나 좋아하면서 한국어로 'Thank you'를 어떻게 말하냐고 물어보더군요.

이제 학교 선생님들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모두 할 줄 알게 됐습니다(2019.03)

갑자기 용품을 체크하던 마담이 저에게 두 손을 모아 배꼽 인사를 하며 "감사합니다 폐하"라며 인사했습니다. 저는 그걸 듣는 순간 자지러졌습니다. 그 마담 알고 보니 드라마 '대조영'의 골수팬이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어 중 최고의 감사 표현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다음 주 월요일 전체 학생 종례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체육 용품을 사 왔다는 사실을 광고하기까지 했습니다(제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체육교육 분야로 온 봉사단원이라면 기본적으로 하는 정말 작은 일인데 너무 큰 박수와 환대를 받아 송구스러웠습니다. 

흔한 우간다 전체 학생 종례 풍경(2019.03)

이 일을 하기까지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단 이 예산 자체도 제 돈이 아닌 다른 분들이 낸 세금이고, 써야 하는 보고서도 노트북 충전기가 고장 나 코디네이터가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학교 차량을 지원받은 탓에 운반도 제 힘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600명이 넘는 학생들의 박수는 제가 받았으니 그저 민망할 따름입니다. 



이쯤 되면 우간다에 살면 살수록 이들을 둘러싼 안 좋은 이야기들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낸 건지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기관 사람들이 잘 몰라서 협조적이지 않을 수 있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 '많은 걸 요구한다', '해주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등 '국민성'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는 부정적인 면모들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협조적이고, 시간 약속을 잘 지키며(가장 의외인 부분), 요구 사항을 말할 때 조심스럽고, 무엇보다 감사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감사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아냐"라고 물어본 제 아빠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죄송? 미안함?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사의 반대말은 '당연'이란다.


웬일로 저희 아빠가 미드에나 나올 법한 명대사를 날렸던 탓에 오글거려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새삼 그게 무슨 뜻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절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들 덕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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