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내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Apr 01. 2019

전문가를 믿읍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전문가인가요?

이 글은 저온화상 환자의 전문병원방문을 장려하기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4

  취미로 또 직업으로 글을 쓴다. 자랑할 만한 실력이 아니라도 열심히 쓰고 있다. 나름 글쓰기 규칙도 있는데 가장 첫 번째는 이거다. '날것으로 감정만 쏟아내는 글은 재미도 감동도 없으니 쓰지 말자'. 나부터가 까다로운 독자라서 그것만은 지키려고 한다. 그런 글은 어느 독자에게도 읽힐 자격 없다는 걸 알아서다. 하지만 오늘은 거친 말 좀 쏟고 감정부터 풀어야겠다.


최선? 이게 정말 최선이었습니까?

  날 선 말에 놀라셨다면 우선 사과드린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읽으신 김에 조금만 더 시간을 내서 이 글의 끝을 잡아 보시는 건 어떨지. 여기엔 내가 여태 써온 그 어떤 글보다 많은 이들의 인생에 도움될 교훈이 담겨 있다.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나의 화상흉터(진)가 그걸 보증한다. 이 글이 누군가의 큰 실수를 막길 바라며 깊은 빡침을 고이 담아 쓴다.




  때는 지난주 토요일, 2도로 추정되는 저온화상을 입은 지 딱 3주 되는 날이었다. 오후 1시에 친구 결혼식이 있으니 서둘러야지. 아침 9시 30분에 여는 병원을 10시에 갔는데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오늘은 유난히 피부 시술이 많아서 원장님이 바쁘시다나. 1시간 기다렸다 불러서 들어갔더니 화상 입은 자리에 재생 레이저를 10분 쏴주고는 나가서 기다리시란다. 상처 감염이 걱정된다며 항생제를 3주째 처방받아 먹는데, 드레싱 때문에 샤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맨상처를 그렇게 두고 대기하라고? 이게 뭐지 싶었지만 그만큼 치료가 얼마 남지 않은 건가 싶어 별말하지 않았다.


  그러고 한 시간 더 기다려서 겨우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이번에도 뭐 지난 1주일간 진료받았던 것처럼 "잘 낫진 않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파이팅"같은 뻔한 말을 하고 드레싱을 갈아주시겠지 했는데,


"이건 대학병원에 가봐야겠네요."

뭐라고요, 선생님?

"상처가 3주가 지나도 낫지 않는 걸 보니 짐작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가 보네요. 월요일에 오시면 소견서 써드릴 테니 대학병원 성형외과 쪽으로 가 보세요."


  이제 와서? 여태껏 내가 상처가 잘 낫는 체질이 아니라며 힘내자고 응원해주다가 갑자기? 할 말은 많았지만 바보같이 말문이 턱 막혀서는 진료비를 내자마자 병원을 뛰쳐나왔다. 갑자기 또 왜 비는 쏟아지던지. 겨우 택시를 잡아 탔는데 기사님 내비에 찍힌 예상 도착시간이 오후 1시 15분이었다. 결혼식은 와장창 지각 확정이다. 지인이 아니라 친구가 결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이만치 늦어 버렸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겨우겨우 하늘 아니 택시 천장 보며 참았다. 친구 결혼식에 내 더러워진 기분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좋아하는 친구니까.


  그래도 어찌어찌 결혼식 행진 전에 들어가 단체사진에 얼굴을 들이밀긴 했다. 얼굴을 마주한 그 찰나에 친구가 나를 보더니 눈이 동그래지더라.


"여름이 왔구나! 언제 왔어! 잘 왔어!"

"...흡..."

"왜 울어?! 늦을 수도 있지 괜찮아! 이렇게 와줬잖아?"

"..."


  다시 꾹 눈물을 참았다. 늦은 것만 해도 죄인인데 이게 무슨 추태람. 5초간의 짧은 대화를 마무리하자마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에 '늦은 친구 1'로 얼굴도장 꾹 남겼다. 넘칠 뻔했던 그 눈물의 팔할은 친구와의 즐겁던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의 행복을 비는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나머지는... '그 외의 다른 것'으로 명명해 두자.




  그렇게 억눌렀던 '그 외의 다른 것'은 결혼식 끝나고 만난 내 최측근 앞에서 방언처럼 터졌다. 상스러운 발음이 몇 번 튀어나온 후 가라앉은 마음을 눈치챈 그는 그새 많은 정보를 찾아봤더라. 우리 회사 근처에 화상전문병원이 있는 걸 알아냈고, 그곳에서 깊은 2도 화상부터 3도 화상까지 어떻게 치료하는지 갖은 후기를 발굴해냈다. 심지어 진료비용까지.


  "진료비는 너 가던 병원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약값이 17만 원 정도라는 글이 있더라. 조금 비싸긴 하네."

  ?

  내가 3주 동안 치료비며 약값에 쓴 돈이 20만 원이다.




  <전문가와 강적들>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은 적 있다. 자세한 내용이 가물가물하지만, 요즘처럼 인터넷이다 뭐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유사 전문가들이 판친다는 구절은 인상 깊었다.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그때 다짐했었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면 전문가를 찾자고. 이번에도 그랬다. 화상 치료는 피부과에 가야 하는구나, 까지만 찾아보고는 인터넷으로 뭔가 더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틀에 한 번씩 전문가를 만나고 있는데 뭐!


  전문가를 믿으라는 그 책의 조언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의심했어야 했다.

  내가 믿는 그 사람은 전문가인가?


  이건 그 병원 의사 선생님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그분은 언제나 대기환자로 넘쳐나는 병원에서 웃으며 환자를 맞이하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화상치료에 특화된 전문가는 아니었다. 만약 맞았다면 나를 더 빨리 큰 병원으로 보냈을 거다. 당연히 나보다는 훨씬 전문가였지. 하지만 내 병을 치료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부들부들 공포 반 빡침 반에 손발을 떨다 그제야 '2도 화상 치료 후기'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세상에. 나처럼 3주 이상, 심지어 한 달이 넘도록 아무 효과 없는 치료만 받던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들 이젠 괜찮은가 싶어 그들의 글을 더 읽어보니 하나같이 '화상병원에서 치료받았더니 이렇게 빨리 낫네요'로 마무리되더라. 차오른 살 위를 덮은 흉터 인증샷과 함께.




  오늘은 3주 넘도록 다니던 피부과를 마지막으로 찾은 날이었다. 거기서 내어줄 소견서를 들고 가야 내일 방문할 화상전문병원에서 진료를 수월하게 받겠구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웬걸. '이 환자는 뜨거운 물주머니에 저온화상을 입었는데 오래도록 낫지 않아서 큰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는 내용 단 두줄이 전부였다. 진료를 시작한 날짜라던가 내가 먹어온 항생제는 무엇이라던가 이런 내용은 전혀 없더라. 이런 게 소견서라면 그냥 오늘에라도 다른 병원 갈 걸.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리야 미안해 미안해 마음으로 울며 걸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렵고도 어렵구나.

하지만 오늘 밤엔 잠을 자자 푹 자자.

내일 일찍 출근해서 오후 다섯 시엔 퇴근해야 한다.

오후 여섯 시면 문을 닫는다는 그 화상전문병원은 오후 다섯 시 반까지만 오면 대기가 길든 어쨌든 그날 안에 진료를 봐준다고 했다.


  다리야 미안해 미안해

결혼식 늦은 친구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리고 방문한 화상전문병원.

3도 화상이란다. 수술을 두 번 받아야 한다고 했다.

바로 다음 날 오전에 첫 번째 수술을 잡아주더라.




* 이 글은 특정인/특정 직업을 비하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며 개인의 짧은 경험담일 뿐입니다.

*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2도 이상의 화상(표재성 2도든 심재성 2도든 3도가 의심되든)을 입은 환자라면 화상전문병원이나 대학병원에 가세요.


* 글의 마무리에서 '사람의 마음', 장기하와 얼굴들의 곡 가사를 빌려와 썼습니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지키던 건 귀찮음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