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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Nov 08. 2019

사는 재미는 얼마면 사나요

내가 자꾸 비싼 물건을 사 모으는 이유

  옛날 옛날, <검정고무신> 세대쯤 되는 아주 먼 옛날. 그땐 학교에서 가정형편을 조사하는 파렴치한 일이 이상하지 않았더래요. “느이 아버지 뭐하시노”랑 “느이 집에 테레비, 냉장고 있나?”가 단골 질문이었다던데, 쯧쯧. 그런 걸 알아서 뭐 어쩌겠다는 거였는지. 게다가 그게 다~ 부잣집을 알아내기 위한 꼼수였다면 두 번째 건 제대로 틀려먹었습니다. 저희 집 이야기를 해 볼까요.

  방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널찍한 책상 위 빔프로젝터. 그 빔프로젝터는 무선으로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에, 유선으로 닌텐도 스위치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슬슬 찬바람 부는 걸 보니 헤드폰은 백팩 속 이어폰이랑 조만간 자리를 바꾸겠네요. 스위치 뒤의 3단 책장은 책이 꽂히다 못해 빽빽이 누워 있는데요, 맨 위층엔 신혼부부들의 스테디셀러라는 블루투스 스피커가 자리잡았습니다. 음악 들으며 노트북으로 마무리하는 지금 이 글의 초고는 얼마 전 지른 아이패드 프로로 썼고요. 콜드플레이의 파라다이스를 듣고 있자니 여기가 천국인가 싶다가도 그럴 리가. 대체 다섯평도 안 되는 사회 초년생 원룸에 이 비싼 물건들이 옹기종기 가득 찬 건 무슨 조화인가요. 어쩐지 제 통장이 텅 비어 있더라니!

  각종 음향 기기는 돈값 하고 있으니 열외, 스위치는 다리 화상 때문에 나가 놀질 못할 때 산 거니까 봐 줍시다. 거 빔프로젝터랑 아이패드는 동작 그만. 과거의 나는 꼭 그렇게 샀어야만 속이 후련했냐! 싶을 만큼 과소비의 달인입니다. 있으면 좋겠다, 사려니까 비싼데, 아냐 오래 쓸 건데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지, 그래 이러려고 돈 벌지, 사자! 로 이어지는 생각이 한두 달 머물다 결국엔 제 손에 그 물건이 들리고 사라집니다. 오래 쓸 거라니 양심도 없지, 비싼 게 아니긴 개뿔. 영화 많이 보자고 산 빔프로젝터는 스위치 게임할 때나 쓰고 그림 많이 그리자고 산 아이패드는 웹툰 볼 때 제일 유용합니다.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고백하자면 제가 사고 싶었던 건 빔프로젝터랑 아이패드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물건들 너머에 있는 삶을 가지고 싶었어요. 영화를 자주 보다 멋들어진 시네필이 되는 삶, 그림을 자꾸 그리면 시작될지도 모를 일러스트레이터의 삶. 그런 삶의 가능성을 돈과 맞바꿀 수 있다면 비싼 게 아니지 않겠어요? 아니라구요? 네 아니더라구요. 형편에 맞지 않는 비싼 기계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그중 제 삶을 바꾼 물건은 없었습니다.

  사는 건 시작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도 이 모든 과소비에도 장점이 있다면, 이제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더 사야 할 물건도 없다는 거...? 머리를 좌로 뒹굴 우로 뒹굴 굴려 봐도 더 사야 할 것, 더 사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와 솔직히 더 살 게 있으면 인간도 아니다.

  이제 집에 있는 물건을 잘 활용해서 살아보렵니다. 사는 재미는 이제 그만, 잘 살아가는 데 재미를 붙여야지요. 그 시작으로 뭘 하기로 했냐면, 이번 토요일부터 6주 동안 주1회로 진행되는 아이패드 드로잉 수업을 들으러 갑니다! 26만 원 할부로 결제했어요! 이건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경험을 사는 거... 라고 핑계를 대 보려 했지만 에이. 정말이지 돈을 안 쓰고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인가요 저는!


*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 9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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