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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Nov 27. 2019

저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2019년 기준, 여름이 짧은 에세이를 쓰는 과정

나 혼자 쓰고 읽는 글, 내가 쓰고 누군가 함께 읽는 글. 제 글은 이 둘로 나뉩니다. 브런치나 뉴스레터에 쓰는 짧은 글은 혼자 보고 말 일기가 아닙니다. 독자가 생길 것을 바라고 쓴 에세이입니다. 이 차이를 의식하고 글을 쓰다 보니 제 맘대로 만들어 지키게 되는 최소한의 순서가 생기네요. 이번 글에는 그 순서를 거쳐 한 편의 글이 완성되는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쓰면 글이 잘 나옵니다’ 하는 주제넘은 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혼자 글을 쓰다 보면 ‘다들 어떻게 글을 쓰고 있나’ 궁금할 때 있지 않나요. 그때 심심풀이로 가볍게 훑어보시면 좋겠습니다.



0. 글의 방향을 정합니다.

독자가 저 하나일지 아니면 불특정 다수일지 미리 정합니다. 혼자 쓰는 글은 저 하나 즐거운 게 목적이라 마구 쓰지만, 독자가 생길지도 모를 글은 읽는 사람의 시간을 아깝게 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씁니다. 그 다짐은 마음속 북극성이 됩니다. 나만 아는 것들을 상식이라 착각하지 말 것, 재미든 정보든 하나라도 갖춘 글을 쓸 것. 작지만 중요한 몇 가지 원칙을 챙깁니다. 물론 북쪽이 어딘지 알아도 길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1. 쓸 거리를 생각합니다.

돈 받는 게 아니면 내키는 것만 쓰자는 게 원칙입니다. 그래서 제 글의 주제는 대부분이 제 마음에 들어온 것들입니다. 출퇴근할 때, 일할 때, 딴짓할 때, 책을 읽을 때, 샤워할 때. 작은 단어나 문장이라도 생각나면 그때그때 메모합니다. 그중 이야기로 풀고 싶은 것들을 모아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2. 펜을 잡습니다.

문자 그대로 펜을 잡아야 합니다. 구성을 짠 다음 글을 쓰니까 키보드가 필요한 건 나중 일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틀리질 않습니다. 펜 잡는 게 제일 어려워요. 쓰고 싶은 걸 쓰는데도 그렇습니다. 조금이라도 신나게 쓰려고 좋은 펜이나 노트를 모은 적 있고, 요즘은 종이도 아낄 겸 아이패드에 펜슬로 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좋은 도구를 쓴다고 좋은 글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3. 글의 흐름을 잡습니다.

글의 큰 흐름이 될 문장을 몇 개 씁니다. 그 문장 하나하나를 각 문단의 작은 주제로 잡고 살을 덧붙입니다. 이것만 잘해도 글이 길을 헤매지 않아서 좋습니다. 가끔 제 흥에 취하거나 시간이 모자라서 이 단계를 생략하는데, 그러면 대부분 못 봐줄 것들이 나오더라고요.


4. 이 글이 독자를 가져도 되는 글인지 다시 생각합니다.

흐름을 잡고 나면 이 글의 가치를 되짚어봅니다. 재미든 정보든 독자가 얻어갈 장점이 있어야죠. 장점을 부각할 방법도 다시 고민합니다. 아무래도 해당사항이 없을 글은 여기서 놓아줍니다.


5. 글에 꼭 넣어야 할 것들을 미리 정리합니다.

써먹고 싶은 말장난,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흐름 사이사이에 기록합니다. 한 문단에 하나씩은 넣으려고 하는데 잘되지 않으면 미래의 나 파이팅! 을 외칩니다.


5.5. 딴짓을 합니다.

여기까지 썼으면 과장 좀 보태서 절반은 쓴 겁니다. 와 신난다. 잠깐 숨통을 트일 겸 웹툰을 보고 간식을 먹고 게임을 합니다. ‘이번 글 잘 나올 것 같다’며 근거 없는 기쁨 속에 딴짓하는 이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6. 글을 씁니다.

드디어 키보드를 꺼냅니다. 여태 준비한 구성을 옆에 두고 지도 삼아 글을 씁니다. 가끔 호롤롤롤 신나게 써내려갈 때도 있지만 머리 쥐어뜯어 한 문장씩 쓰는 게 일상입니다. 흐름 따라 힘을 줘야 할 부분과 빼야 할 부분이 있는 것도 고려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잘 안 써지더라도 어떻게든 써 봅니다. 그래야 일단 마침표를 찍고 쉴 수 있으니까요. 파이팅을 외치던 과거의 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습니다. 이 엉망인 글을 어떻게 고치나. 나는 왜 이렇게 글을 못 쓰나. 이래서 뭐 먹고 사나. 저의 부족함을 다각도로 살펴보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6.5. 딴짓을 합니다.

6까지 쓴 글은 절대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수정할 게 많거든요.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힘을 모아야 합니다. 다시 웹툰도 보고 간식도 먹고 게임도 합니다. 인터넷 서점에 새로 나온 굿즈를 구경하다가 '만약에 내가 책을 내면 어떤 굿즈를 함께 팔까' 망상을 시작합니다. 굿즈는 무슨, 지금 쓰던 짧은 글도 마무리 못한 게 떠오릅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글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계속 무거울 겁니다.


7. 글을 다듬습니다.

컴퓨터와 휴대폰 화면으로 확인한 글을 눈과 입으로 읽습니다. 문장을 여러모로 확인하고 고친 다음 맞춤법 검사기를 돌립니다. 그 사이사이 인스타 피드 구경하고, 새로 나온 책 뭐 있나 살펴보고, 게임도 합니다. 저 참 딴짓 많이 하네요.


8. 마지막 확인을 거쳐 완성!

글을 공개합니다.


9. 관심에 연연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회사에선 마케터로 일하지만 개인적으로 쓰는 글에서까지 조회수에 목매고 싶진 않습니다. 제목을 자극적으로 쓰거나 검색이 잘 될 단어들을 본문에 일부러 넣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글을 올리고 나서도 조회수나 댓글에 연연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제가 잘 썼으면 그만이죠 뭘.


10. 정말 좋은 글을 읽습니다.

물론 이상과 현실은 달라서 제 맘에 든 글이 기대보다 관심을 못 받으면 아쉽습니다. 그럴 땐 훌륭한 작가분들의 정말 잘 쓴 글을 읽습니다. 내가 쓴 글이 고작 저 정도인데 관심을 바랐다며 한바탕 부끄러워집니다. 그러고 좀 지나면 욕심이 고개를 듭니다. 나도 이런 글 쓰고 싶다. 그렇게 새로운 글을 쓰게 됩니다. 저번 글보다는 조금 더 낫길 바라면서요.



제가 2019년까지 계속해 온 글쓰기 과정입니다. 생각보다 더 별다를 게 없네요. 다만 내년에는 이 순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글도 써보려 합니다. 긴 글을 쓴다거나, 소설을 쓴다거나. 어떤 순서로 쓰던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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