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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05. 2019

지갑도 마음도 가난한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십만 원짜리 코트가 가르쳐준 것

코트를 새로 사야겠다. 작년에 몇 번 걸치던 분홍색 롱코트가 너무 닳았다. 대충 걸치자면 그런대로 입겠지만 천이 해지고 보풀이 생긴 부분은 못 봐 주겠다. 어쩌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이 코트를 살 때 매장 직원과 이런 얘기를 나눴었다.


이 코트랑 저 코트, 보기엔 똑같은데 왜 얘가 훨씬 싸죠?

아 그거. 재질이 달라요. 울 혼용율이 좀 낮죠.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차이가 날까요?

아무래도... 확실히 나요.


아무렴 어때. 15만 2천 6백 원에 코트랑 니트 한 벌을 사고 좋아했던 기록이 가계부에 남아 있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좀 더 가난했다. 아주 가난했던 대학 시절엔 동대문에서 7만 9천 원짜리 코트도 벌벌 떨며 계산했는데 이 정도면 잘살고 있네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건 빨간색 숏코트였다. 애시당초 울조차 들어있지 않았을 거다. 사회 초년생 때 그 코트를 입고 모임에 나갔더니, 한 언니가 날씨 너무 추운데 대학 새내기 때 입던 것처럼 얇은 코트를 입고 왔네 어떡하냐며 걱정해 줬다. 그 코트는 며칠 있다 버렸다. 비슷한 값을 준 다른 코트들도 그때 같이 버렸다. 옷장이 비었다.


유일하게 잘 입는 건 작년에 산 30만 원짜리 헤링본 롱코트. 옷 한 벌에 그렇게 큰 돈을 써본 건 처음이었다. 첫 월급을 받고 난생처음 내 돈으로 월세를 내던 때만큼 떨렸다. 2개월 할부를 부탁하며 이게 어른의 소비인가 했는데, 살까 말까 고민했던 게 무안할 만큼 잘 입고 다닌다. 아무래도 이런 코트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는데.


어리고 가난할 땐 뭐든 싼 걸 여러 개 샀다. 특히 옷이 그랬다. 만 원짜리 맨투맨이라도 맨날 바꿔 입으면 옷 살 돈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겠지. 그땐 참, 없어 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격지심이 뇌를 장악하던 시기였다. 더치페이 하면 될 자리에서도 괜히 내가 산다 그러고, 다음에 네가 사라며 웃고, 대개 다음은 없고,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요즘은 좀 나아졌나 싶다가도 내 속이 쓰린 걸 보니 여전한 데가 있다. 며칠 전 한 친구의 생일이라 커피랑 케이크를 묶어 파는 9천 8백 원짜리 기프티콘을 보내며 생일 축하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길래 좋은 하루 보내라고 카톡을 마무리했었다. 그 친구가 어젠가 엊그젠가 인스타에 자기가 받은 선물들, 기프티콘들을 캡쳐해 올렸더라. 내가 보낸 기프티콘은 거기에 없었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뭐 그럴 수 있지.


잠깐, 하나 짚히는 데가 있어 그 친구와의 카톡을 뒤져봤다. 그 친구를 알고 지낸 게 이삼년 쯤 됐나. 내가 생일을 축하한 기록만 두 번 남아 있었다. 그 친구는 내 생일을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다음에 네가'는 무슨.


나는 지갑도 마음도 가난한 사람인가 보다. 밥 굶을 일 없이 사는 지금도 바뀐 게 없다. 몇 년 전 산 코트, 얼마 전 보낸 기프티콘이 아깝다. 가치 없는 데 돈을 쓰고 마음을 쓰면 속이 쓰리다. 없어도 모를 9천 8백 원어치 호의였는데도. 참 나란 사람의 쪼잔함에 한숨을 쉬다 마음을 굳게 먹기로 한다. 이왕 이런 쪼잔한 사람으로 나고 자란 거, 이 참에 제대로 쪼잔해져 버리겠다.


내년 내 목표를 세웠다. 가치 없는 것에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낭비하지 않기, 차곡차곡 모아 필요한 것에 큰 돈과 큰 마음 쓰기.

무엇이 크고 오래 남을 것인가.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차이가 난다.

아무래도 확실히 난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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