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Dec 27. 2019

그런데도 종이책을 사서 봅니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책이 한 보따리, 그래도 그럼에도

  책에 돈을 많이 씁니다. 없는 형편에도 한 달에 10만 원어치 꼬박꼬박 사 모으고 있어요.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따져 보면 과소비지만 "돈 버는데 이런 데도 못 쓰나", "사 놓으면 언젠가 다 읽는다고", "신간은 도서관에 없잖아" 라며 제 발 저려 핑계를 대고 있죠. 다들 이상하게 마음 가는 것이 있잖아요. 피규어를 모은다거나 향수를 모은다거나. 저는 하필 모으는 물건이 책인 것뿐입니다. 읽느냐 읽지 않느냐는 사둔 다음의 문제고요.


  책은 수집품 중 가장 실용적입니다. 펼쳐 읽으면 두세 시간 금방 보낼 수 있죠. 심지어 어떤 책들은 재밌기까지 합니다! 표지나 띠지나 목차, 처음 몇 페이지를 아무리 살펴봐도 재밌는 책 고르는 건 참 어렵잖아요. 운수 좋게 재밌는 책을 만나면 소장가치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책장을 넘기며 읽습니다. 책 끝을 접는 대신 포스트잇을 붙이고, 밑줄을 긋는 대신 휴대폰으로 찍어요. 아주 그냥 금지옥엽. 사실 재미없는 책도 깨끗이 봅니다. 알라딘에 제값 받고 팔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또 그 돈으로 새 책을 사고, 뭐 그런 거죠!


  그렇게 아껴 읽는 책들이라 다른 사람에게 선뜻 빌려주진 않습니다. 표지도 본문도 접지 말고 빌려준 그대로 읽고 돌려달라고 부탁하는 게 영 구구절절하기도 하고,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해서 빌려줬다 돌려받지 못한 책은 두 손으로도 다 세지 못할 정도라서요. 재밌게 읽었으니 빌려준 것들이라 더 씁쓸합니다. 제일 많이 추천한 <청춘의 문장들>, <보통의 존재>는 세 번씩 다시 샀을 정도예요. 인생은 실전, 이렇게 얻는 깨달음 덕에 책은 추천만 하되 빌려주지 말자, 재밌으니 도서관에서 찾아보라고 하자, 그게 출판계와 나를 살리는 일이다, 다짐하게 되었어요.


  그치만 정말 저 혼자 볼 책이었다면 전자책을 모았을 걸요. 사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눠 보려고 굳이 종이책을 삽니다. 저라면 사지 않았을 책은 빌려보고, 그 손에 제가 재밌게 봤던 책을 들려 주고. 그렇게 책 바꿔 읽는 게 얼마나 재밌게요. 빠른 시일 내에 또 만날 핑계도 생기고요. 대신 이제는 정말정말 멀어질 리 없는 사람들에게만 책을 빌려줍니다. 다섯 명 안 될 걸요. 그들이 저의 절친들이고 제가 가장 자주 그리고 꾸준히 안부를 묻는 사람들입니다. 모르죠. 그들의 안부와 더불어 그들이 볼모로 잡고 있는 제 책의 안부가 궁금한 것일지도요.


  세상에 싫은 게 너무 많아 사람 깊게 사귀는 걸 어려워하는 저에겐 '언제 책을 빌려줘도 아깝지 않은 사이'가 가장 친하고 편한 사이입니다. 그의 배려를 믿을 수 있는 사이, 조만간 다시 만나 다른 책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 그런 사이에선 늘 먼저 건네는 말입니다.


"진짜 재밌는데, 이 책 빌려줄까?"



*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 11편에 실린 글입니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너라도 외롭지 않은 크리스마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