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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n 24. 2020

우리 것이 힙한 것이여, 이날치에 홀리다

홀릴 준비가 된 분들을 위한 이날치 입덕 권유 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듯, 유튜브 프리미엄 3개월이면 취향을 꿰찹니다. 타이거디스코, 요한 일렉트릭 바흐, 멜론으로 못 듣던 갖은 명곡들을 감상하다 보니 유튜브가 얼마 전 이런 음악을 추천해 주더라고요. 일단 들어보실까요.


[온스테이지2.0] 이날치 - 범 내려온다(with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


범상치 않은 제목에 눌러 봤는데 아뿔싸, 범 내려온다는 첫소절에 ‘어떻게 내가 이걸 몰랐지?’ 했습니다. 이 충격은 새소년(제가 제일 좋아하는 긴 꿈​)을 처음 들었을 때 ‘천잰가?’ 싶던 것 이상이었어요. 대체 이날치는 누구인가, 이 음악은 뭔가, 저기 저 춤추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음악 한 곡에 이렇게 여러 가지 궁금해지는 건 또 처음이네요.

이날치는 네 명의 소리꾼(안이호, 권송희, 이나래, 신유진)과 베이스 둘(장영규, 정중엽) 드럼 하나(이철희)로 구성된 밴드 이름입니다. 조선 후기 명창의 이름을 따온 거래요. 장르는 국악 아니고 얼터너티브 팝. 장구 대신 드럼, 기타 없이 베이스만 둘이라니 재밌는 조합이죠. 정중엽은 제가 엄청 좋아하던 장기하와 얼굴들의 베이스였고, 밴드 리더인 장영규는 <곡성>, <부산행> 등의 영화음악 감독이었다는 이야기를 포함해 각 멤버들의 커리어도 화려했습니다. 음악에 맞춰 저세상 텐션으로 춤을 추는 댄서들은 엠비규어스 댄스 컴퍼니 분들이었고요.

물론 음악에 경력이 뭐가 중요한가요, 실력은 소리로 증명하는 거지요. 판소리 수궁가를 열한 곡의 밴드 음악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이날치의 <수궁가> 앨범이 얼마 전 나왔다길래 그걸 쭉 들어보았는데요. 와 이거 장난 아닙니다.



일단 베이스가 훌륭해요. 베이스, 그 두둥거리는 소리가 없으면 섭섭하지만서도 고막에 들러붙는 일렉기타의 리프나 두둥둥짝 묵직한 존재감의 드럼보다야 눈에 띄지 않는 느낌이었는데요. 이날치의 베이스에는 곡 전체를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베이스가 밋밋하지 않게 찰떡인 건 소리꾼들 목소리 자체가 다채로워서 아닐까 해요. 기존의 밴드 음악, 발라드, 더 나아가 트로트 가수랑 비교해 봐도 그들의 목소리는 단연 돋보입니다. 국악은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 감히 일반화할 수 없지만, 그 자체로 악기가 필요 없을 만큼 자기주장이 뚜렷한 느낌? 국악이 제게 ‘잘 모르는 분야’로 남아있던 것도 바로 그 인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지는 건 매력이지만 한국어로 쓰인 가사인데도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고, 너무 길고, 목소리에만 집중해야 하고. 그러면 춤을 출 수 없잖아요?


리드미컬한 댄스음악을 위해 소리꾼 1명이 다 하던 소리도 여러 보컬로 나눴다. 이나래는 “보컬 네 명 모두 스승에게서 배운 소리가 달라서 같은 수궁가인데도 쓰는 단어가 다르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며 웃었다. 타루, 타니모션 등을 통해 줄곧 대중음악과 협업을 해온 권송희는 “정통 판소리는 기술적 부담감도 있고 외롭기도 하지만, 이날치에선 다 함께 즐겁게 부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멤버들은 ‘국악의 현대화’ ‘국악의 세계화’ 같은 표현을 부담스러워했다. 애초 목표가 ‘판소리로 춤출 수 있는 재미있는 음악을 하자’였기 때문이다. 안이호는 “아무 편견 없이 편하게 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유진도 “있는 그대로의 리듬을 타며 즐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한국일보 기사​​​ 중 (https://n.news.naver.com/article/469/0000504950)


이날치 음악은 ‘판소리로 춤출 수 있는 재미있는 음악을 하자’는 목표 그대로, 춤추기에 최적화된 박자와 장단을 갖췄습니다. 한 번 완창하는 데 세 시간 걸린다는 수궁가가 한 트랙에 길어야 5분 남짓 팝 음악으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많이 바뀐 것 같은데도 정작 소리꾼들은 ‘원형을 그대로 살렸다, 창법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이날치는 공연에서 최근 발매한 정규 앨범 ‘수궁가’에 수록된 11곡을 라이브로 선보인다. 완창에 3시간가량 걸리는 ‘수궁가’에서 인상적인 대목만 골라 뉴웨이브 스타일로 재탄생시킨 곡들이다. 베이스와 드럼, 전자피아노 등으로 반주를 미리 짜고 판소리 원형을 그대로 반주 위에 얹었다. 이 방식을 통해 소리꾼들은 본업인 판소리 완창을 하는 데 방해받지 않고 밴드활동을 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퓨전국악 또는 국악가요처럼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바꿔 부르면 호흡이 짧아집니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지구력이 떨어져 목 근육을 오래 쓰는 완창 판소리를 하기 힘들어지죠.”(이나래) “원형을 그대로 살리니 밴드 활동을 하면서도 창법을 전혀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이날치의 소리꾼 모두 올해 완창 판소리 무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신유진)

- 한국경제 기사​​​ 중 (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4357084)


반주를 짜고 판소리 원형을 그 위에 얹은 게 이날치 음악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어설프지 않은 거였어요. 이건 국악 조금 + 밴드 음악 조금 = 타협해서 나온 애매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협업을 잘해야 한다며 개발자가 기획하고 기획자가 페이스북 광고 돌리고 마케터가 코딩 배워서 서비스를 만들면 매우 높은 확률로 뒤틀린 황천의 무언가가 나오잖아요. 하지만 견실한 기획이 있고 그 아래 각 직무의 전문가들이 자기 맡은 바 최선을 다하면 멋진 프로덕트가 나올 텐데, 바로 그 멋진 프로덕트가! 이날치가 만드는 음악들 아니겠습니까. 엠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와 함께 무대를 가진 것도 곡을 돋보이게 하는 데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아는 사람의 혜안이었고요. 이렇게 춤추기 좋은 음악이 되면 잘 안 들리는 가사조차 전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락이든 팝이든 언제는 가사 알아듣고 좋아했나요!

이날치를 알게 된 게 지지난 주말이었고, 마침 지난 주 금요일에 앨범 발매 기념 콘서트가 열리는 걸 알게 되어 호다닥 반차 쓰고 다녀왔습니다. 와, 장난 아니었어요. 에너지가 공연장을 찢던데요. 영상으로 미처 전해지지 않던 흥을 온몸으로 느끼는 귀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만 홀려서 나온 게 아니더라고요. 이번 앨범은 디지털 음원이랑 LP 발매만 했다는데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줄에 줄을 서서 LP판을 사갔습니다. CD도 아니고 LP를요! 그 인원이 관객 전체의 3분의 1은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피리 부는 소년에 홀린 아이들처럼 이날치에 홀린 사람들. 경이로운 표정으로 LP를 받아드는 외국인, 고개 끄덕이고 발로 박자 맞추며 손으로는 분주하게 LP 포장을 뜯는 청년, 우리 모두 위 아 더 월드요 위 아 더 이날치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거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이며 세계 뿐이겠어요.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널리 인기를 끌 수 있는 세상입니다. 자기 색으로 자기 것을 만드는 아티스트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홀릴 준비는 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홀릴 준비가 된 분들, 이날치 공연을 꼭 한 번 가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 #45에 실린 글입니다.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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